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y, 2018

우리는 어떤 존재들인가

Editor. 지은경

상대방의 거짓과 음모가 밝혀지는 순간은 복잡미묘하다. 서럽던 과거를 되새기면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한편으론 진실을 마주하는 쾌감을 경험할 수 있어 꼭 나쁘지만은 않다.
다만 인간의 초라한 본성에 세상살이가 씁쓸할 뿐이다.

『쥐』 아트 슈피겔만 지음
아름드리미디어

전쟁은 인간의 악행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도 무서우며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에 대다수가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 책을 손에 들고 한장 한장 넘기면서 위 생각은 도무지 멈추지 않고 반복되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대량학살이 공식적으로 진행되었던 장소 아우슈비츠는, 그래서 꼭 가보아야 할 장소인 동시에 엄청난 용기를 갖지 않고서는 쉽게 찾아가 볼 수 없는 곳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만화의 즐겁고 해학적인 성격이 전쟁과 학살 이야기와 만나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이 책을 선물 받고도 쉽게 펼쳐볼 수 없었던 이유일까? 제주도 책방 취재 중 만춘서점에서 친구가 사준 바로 그 책, 아트 슈피겔만의 『쥐』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만화로 담은 이 책은 제목처럼 유대인들이 ‘쥐’로 등장한다. 어쩌면 나치가 그들을 해로운 동물인 ‘쥐’라고 여겼기 때문일까? 책에서 묘사된 쥐들은 온순하고 영리하지만 약하다. 유대인을 핍박하는 나치는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 러시아인은 곰, 나중에 전쟁을 종결짓는 미국인은 개로 등장한다. 그렇다고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이 해당 동물의 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내어 흑과 백의 논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같은 유대인이지만 나치의 편에서 동족을 배반하는 ‘쥐’들도 등장한다.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아버지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지도 않다. 책은 오히려 이 책을 그리고 쓴 지은이이자 아들인 아트와 아버지 블라덱 사이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감정의 깊은 골을 드러내 보여준다.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영웅이지만 일상이 불만으로 가득하고 편협한 세계관을 가졌으며, 그 자신도 차별적 대우에 치를 떨었음에도 흑인을 향해서는 인종차별주의자다. 작은 푼돈에도 두 손을 벌벌 떠는 아버지의 궁핍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에게 우리는 매우 깊은 공감을 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 블라덱이 그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도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생존만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격동을 겪은 끝에 인간성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깊은 상처로 평생을 버텨야 한다. 더구나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함께 살아남은 사랑하는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현실은 그에게 더욱 큰 아픔으로 남았을 것이다. 타인의 죽음을 한 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일 텐데 살아남기 위해 매일같이 미끌거리는 시체더미 위를 걸으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극들을 견뎌야 했던 생존자는, 미래를 포함한 인생 전부를 송두리째 빼앗겨 몰살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트 슈피겔만은 아버지로부터 당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전해 듣는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뒤틀린 성격이 묘사되고 부자지간의 잦은 다툼까지도 여과 없이 나타난다. 무겁고도 가슴 아픈 현실을 담은 이 책이 한 권의 만화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간결한 그림이 한몫 했을 것이다. 각 나라 사람을 동물로 표현하여 복잡한 인종과 국가 간 입장 차이에 대해 설명을 줄일 수 있었다. 등장인물의 얼굴을 통해 금방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이라는 거대한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옳고 그름의 도덕적 관념을 보여주려 했다기보다 그러한 현상이 이후 세대 간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흑과 백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안간힘 쓰는 인간의 참상에 대해 매우 현실적으로 서술하려고 했다는 점이 독자에게 매우 진솔하게 다가선다.
어떠한 영화나 책에서도 그 시작과 긴 여정의 민낯을 세세하게 보여주진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은 한 남자의 젊은 시절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전쟁의 시작과 끝을 온전하게 바라보게 해준다. 쥐덫의 표현이라든지 점점 조여오는 압박감, 그리고 쥐들의 임시 거처였던 쥐구멍에 이르기까지 숨 막히는 상황들을 매우 훌륭한 비유로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끔찍했던 포로수용소에서의 일상과 그 지옥 같은 세상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이기심과 경멸이 낱낱이 소개된다. 이러한 간결한 이야기 전개 방식은 만화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로 적잖은 충격을 던져 준 이 책은 만화책으로는 유일하게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 책은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핵심은 어쩌면 인간 본성의 탐구에 더 깊게 치중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책이 그리는 인간 본성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