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럽과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대륙을 잇는 호수가 된 바다, 지중해의 이름은 라틴어로 ‘땅의 중심’이라는 뜻의 단어‘Mediterraneus’에서 비롯되었다. 온대와 아열대기후에 속하는이 지역의 오렌지색 햇살은 유난히 눈부시다. 사람들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그을려 있고 따사로운 햇볕을 반사하는 표정 또한 온화하다..
지중해를 마주하는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해안도시들은 전쟁과 침략, 무역 상인들에 의해 서로의 문화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에는 무슬림 문화의 흔적이, 북아프리카 모로코나 튀니지 같은 나라의 작은 건축물들에서는 어딘지 유럽과 터키 풍의 분위기가 감돌기도 한다.
지중해는 특별한 바다다. 온난한 해안가 기후 덕분에 올리브와 오렌지 농사는 매번 풍년이다. 그래서인지 지중해는 언제나 풍요롭고 자유분방한 인상을 준다. 그 풍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따뜻하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바다의 화가라고 불리는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의 호아킨 소로야Joaquín Sorolla는 이러한 발렌시아 해변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잘 묘사했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사람들의 모습과 바다의 물결, 곳곳에 반사되던 빛의 밝기와 공기의 농도, 습도, 냄새까지 느껴진다. 100년도 전에 그려진 이러한 그림들에 유독 마음이 가는 까닭은 조금은 새로운 여름을 맞이하고 싶은 우리의 바람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는 언제나 발렌시아로 돌아갈 생각만 합니다. 그 해변으로가 그림을 그릴 생각만 합니다. 발렌시아 해변이 바로 그림입니다.”호아킨 소로야는 바닷가에서 느끼는 기쁨을 그림에 담았다. 클로드 모네는 그를 “빛의 대가”라고 호평했고, 고야와 피카소 사이의 시기였던 20세기 초, 그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로 급부상했다. 30대 중반에 이런 명성을 얻은 소로야는 초상화 주문과 바쁜 전시 참가 활동 속에서도 틈틈이 고향의 해변을 찾아와 그림을 그렸다. 해안가의 어부들, 물놀이하는 아이들, 해변을 산책하는 우아한 숙녀들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색과 신선한 바람을 그는 재빠르게 그려야 했다. 빠르게 그리지 않으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풍경이니 말이다. 그는 마드리드에 살았지만 1년에 한 달 이상은 발렌시아 해변에 머물며 그곳의 강렬한 빛과 너른 수평선에 빠져들었다.
“야외에서 천천히 그린다는 건 내게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그러고 싶다고 해도… 우리 주변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던가? 수면은 흔들리며 박자를 흩트리고, 구름은 옮겨 다니며 모양을 바꾸고, 저 멀리 보트를 묶은 로프는 느리게 출렁이고, 소년은 뛰고, 저 나무들은 가지를 늘어뜨렸다가 다시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니… 모든 것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태양은 그 모두를 움직이게 만든다. 태양은 끊임없이 모든 것의 겉모습을 변화시킨다… 그릴 땐 빠르게 해내야 한다. 안 그러면 당신이 다시 만나지 못할 많은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소로야는 제1차 세계대전과 아방가르드와 같은 현대미술사조의 흐름에 휩쓸리면서 빠르게 잊혔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의 작품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2009년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의 회고전을 시작으로 2016년 독일 뮌헨 미술관 기획전 〈빛의 거장(Spain’s Master of Light)〉, 이어 2019년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서 〈소로야, 빛의 거장(Sorolla: Spanish Master of Light)〉전이 열렸다.이 전시는 1908년 런던 전시 이후 111년만에 영국에서 다시 열린 개인전이었다. 20세기 초, 당시 영국 미술계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화가”라며 그를 환영했었다. 누구에게나 눈부신 햇살이 필요하듯, 회색 날씨가 일상인 영국인들에게 소로야는 화려한 빛을 뿜는 이국적 장면을 보여주는 화가로 다시 찬사를 받고있다.
호아킨 소로야는 1863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고향 발렌시아 해변과 그곳의 사람들, 가족과 아내를 평생 사랑하며 살았다. 두 살 때 콜레라 대유행으로 양친을 잃고 이모댁에 입양된 그는 어린 나이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10대 후반에 발렌시아 예술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21세에 처음으로 그린 대형 역사화 〈1808년 5월 2일〉은 스페인 미술전에서 2위로 입상한다. 이듬해 그는 발렌시아 주정부의 지원으로 4년 동안 로마로 유학을 떠났는데, 유학 기간중에는 르네상스 미술을, 프랑스 파리에서는 처음으로 ‘모던 회화’를 경험하게 된다. 파리의 인상주의 미술 운동을 만난 것은 소로야의 작품 활동에 전환점이 되었다. 20세기 이후 그는 야외로, 자연의 빛을 향해 깊이 다가갔다. 그의 팔레트와 붓질은 자연 풍경과 그라나다의 무슬림 정원,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다 앞에서 솜씨를 발휘했다.
소로야는 그림을 천직으로 생각했고, 늘 과로했다. 길이 70m에 달하는 〈스페인의 비전〉 연작을 의뢰받아 7년 동안 작업하면서 신체적 마비를 여러 차례 경험하기도 했다. 1919년 〈스페인의 비전〉을 완성한 뒤 의사의 권고로 휴가를 보내는 동안 그는 다시 지중해 해안과 마드리드의 집으로 돌아가, 늘 그리워하고 그리고 싶어했던 바다와 시에스타(낮잠), 자신이 손수 가꾼 정원을 때론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과 함께 그렸다. 소로야는 1920년 자택 정원에서 초상화 작업을 하다 쓰러졌고,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1923년 세상을 떠났다. 1932년 그의 아내와 가족은 마드리드의 집과 정원에 소로야 미술관을 열었다.
오랜 시간 잊혔던 화가지만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그의 그림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여름 바닷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우리는 소로야의 그림 속 풍경을 뚫어지게 응시하게 된다. 캔버스에 굵게 나타나는 과감한 붓 자국은 사진보다도 더 간결하게 바다의 공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여름 바다가 딱 그 안에 들어있기에 그의 지중해 바다가 더욱 익숙하고도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