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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가미와 치요가미
에디터: 유대란
창의력과 수리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지며 유아 교육에 널리 활용되는 종이접기는 예로부터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놀이다. 15세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19세기의 루이스 캐럴도 종이접기를 즐겨했다. 종이접기는 경제적이기도 하다. 색종이, 껌종이, 영수증 등 반듯한 종이 한 장과 두 손만 있다면 기하학과 대칭을 이용해서 거의 모든 형태의 입체물을 만들 수 있다. 종이접기의 역사가 천 년이 넘는 일본에서는 그것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다. 종이접기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이자 고유명사가 된 ‘오리가미’는 일본어의 ‘접다’라는 뜻의 ‘오리(折り)’와 ‘종이’라는 뜻의 ‘가미(紙)’의 합성어다. 오리가미는 오밀조밀한 요소들이 자연의 각 요소들을 상징하는 일본식 정원이나 단 세 줄에 삶을 담는 정형시 하이쿠처럼 거대하고 복잡한 세계의 본질을 도출해 그것의 축소판을 만들기 좋아하는 일본인의 예술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종이접기는 1~2세기경 중국에서 발생해 6세기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시작은 중국이었지만 종이접기 문화는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 오리가미는 8세기 일본의 헤이안 시대의 귀족 생활과 의식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종이는 굉장히 귀하고 값비싼 물품이어서 오리가미는 특정 계급만이 누릴 수 있었다. 사무라이들은 선물을 교환할 때 ‘노시(のし)’라고 불리는 행운의 상징을 선물에 덧붙여서 주고받았다. ‘노시’는 색종이를 접어서 길쭉한 육각형으로 만들고 그 위에 얇게 저민 전복이나 육포를 붙인 것이었다. 결혼식에서는 종이로 신랑 신부를 상징하는 수나비와 암나비를 접어서 사케 잔을 포장해서 대접하기도 했다. 다도 장인에게 부여되는 증명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접혀서 전달되었다. 증명서가 엉뚱한 사람의 손에 들어갔을 경우를 대비해서 한번 개봉하면 다시 원상복구시킬 수 없도록 고안한 접이 방식이었다.
종이가 비교적 대중화된 14세기 무로마치 시대부터는 더 많은 사람이 오리가미를 즐겼다. 계층별로 즐기는 오리가미의 스타일이 달라서 종이를 어떻게 접느냐가 계급을 드러내는 지표가 되기도 했다. 오리가미가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화된 건 17세기 에도 시대였다. 일본 예술과 문화의 전성기로 알려진 이 시대에 오리가미에 관한 최초의 출판물인 『천 마리의 학 접기』(1797)와 열도의 종이접기를 집대성한 『한겨울의 창』(1845)이 출간되었다. 『한겨울의 창』에는 종이 개구리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종이 개구리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일본어에서 명사 ‘개구리(가에루, 蛙)’는 ‘돌아오다(가에루, 帰る)’라는 의미의 동사와 발음이 같아 게이샤가 손님을 접대한 후 종이 개구리를 대들보에 꽂아 손님이 다시 찾아주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천 년이 넘는 긴 세월을 거쳐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일본 전통의 오리가미는 약 150가지다.
일찍이 종이접기 문화를 발전시킨 건 일본인들만이 아니었다.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종이접기를 받아들인 8세기에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들은 스페인을 점령하며 다양한 학문과 기예를 전파했다. 거기에는 종이접기 문화도 있었다. 수학과 천문학에 능통했던 중세의 이슬람교도들도 수준 높은 종이접기 문화를 발전시켰는데 도상을 금기시한 이슬람의 교리로 인해 동물접기보다 기하학적인 종이접기가 발달했다. 알함브라 궁전 벽을 장식한 테셀레이션tessellation(쪽매 맞춤, 도형을 이용해 틈이나 겹침 없이 평면이나 공간을 메꾸는 형태)도 기하학과 수학에 대한 그들의 앞선 지식과 기예를 보여준다. 스페인 종교재판 이후 이슬람 문화는 박해를 받았지만 종이접기 문화는 용케 오래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스페인의 시인이자 철학자 미구엘 드 우나무노는 오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종이접기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20세기에 들어 종이접기는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아동 교육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 정확함과 끈기를 갖고 엄격한 순서를 따라야만 완성할 수 있는 종이접기는 학습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자연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체계를 발견하고자 하는 호기심이 창의력으로 연결된다. 프뢰벨 블록을 발명한 19세기의 교육자 프리드리히 프뢰벨과 과학기술과 예술을 결합한 바우하우스의 교수 라슬로 모홀리 나기도 수업에 종이접기를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