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September, 2020
오늘의 삶은 내일을 위한 특별한 거울이다
Editor.윤성근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가게에서 일꾼과 손님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인사하는 풍경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몇 달 사이 감염병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책방 분위기도 전과는 달라진 구석들이 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크게 느끼는 부분은 최근 들어 책을 권해달라는 손님의 부탁이 부쩍 늘었다는 거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 탓일까? 아예 대놓고 미래가 배경인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는 손님도 있다.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요.”
이런 말을 들을 때 책방 주인은 심각한 내적 갈등에 휩싸인다. 정말로 미래소설을 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정도령이나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닌데 어떻게 세상을 예견하는 책을 권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이유라면 차라리 우리 책방 옆 건물에 있는 점집에 가보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은 2020년이다. 쥘 베른Jules Verne이 1863년에 써놓고 발표하지 않은 미래소설 『20세기 파리』의 1960년대는 이미 오래된 과거가 됐고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년도 지나갔다. 이것들과 비교하면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방문한 2015년은 바로 엊그제같이 느껴지는데 벌써 5년 전이다. 어릴 때 만화영화로 봤던 ‘2020 원더 키디’의 시대가 왔지만 놀라운(Wonder) 것은 우주의 악당들에 맞서는 아이들(Kid)이 아니라 코로나19라는 무서운 감염병이 전 세계를 뒤덮은 사건이다.
메르스와 사스의 시대도 겪었지만 코로나19는 그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의 일상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미래소설에서 느닷없이 지구를 침략한 우주 악당처럼! 마스크를 벗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일상을 옭아맨 불안의 덮개까지 걷으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느닷없이 닥친 사건일까? 변종 바이러스는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결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바이러스뿐만이 아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과 생태계 파괴, 사라지는 열대 밀림 등 환경파괴의 대가를 머지않아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오래전 부터 있었다. 이렇듯 지금 우리 앞을 벽처럼 막아선 불안의 그림자는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볼 때 더욱 선명해진다.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사제이자 뛰어난 교육자, 그리고 사회학자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미래학자라고 불러도 될 만큼 세상을 앞서 내다본 사람이다. 그런데 일리치의 전문 영역은 미래가 아닌 과거다. 인류의 역사를 끈질기게 파헤쳐보면 우리가 만들 어갈 미래의 모습을 예감할 수 있다.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는 그런 일리치의 뛰어난 재주를 증명하는 책이다.
이반 일리치의 책은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제법 많이 소개되었는데 처음엔 너무나도 급진적인 주장 때문에 주된 비판 대상인 미국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가 말한 “그림자 노동”이나 “전문가들의 사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됐다. 또한 “학교 없는 사회”라는 주장이 정말로 학교를 없애버리자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가 “병원이 병을 만든다”고 했을 때는 지성인들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였지만 자본에 잠식된 병원과 의료시스템의 위험을 실감하는 지금에 와서는 이반 일리치가 당시에 얼마나 정확하게 세상을 진단하고 있었는지 감탄하게 만든다.
실제로 나는 요즘 이반 일리치의 책을 손님에게 자주 권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책이 필요한 이유와 상황이 다르므로 일리치가 쓴 많은 책 중 어떤 한 권을 딱 골라 제시하는 건 어렵다. 그럴 때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를 뽑아 든다. 이반 일리치가 했던 강연을 모아 엮은 이 책을 읽어보면 그의 다양한 연구 분야를 골고루 맛볼 수 있다. 특히 물과 환경에 대해 강연한 ‘망각의 강과 H₂O’는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꼭 읽어볼 만한 부분이다. 역시 일리치답게 여기서도 과거를 분석해 이를 근거로 현대에 대안을 제시하는 탁월한 모습을 보여준다.
감염병의 시대는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그저 지나간 날이 아니다. 나는 앞으로 한동안 책방에 오는 손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할 것 같다. 코로나19가 과거가 되더라도 그저 우리가 겪었던 무용담 식으로 말하지는 말자고. 우리가 살았던 오늘은 내일이라는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거울 같은 특별한 하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