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오늘의 미술 사용법
에디터 : 전지윤, 김수미, 지은경
미술은 장엄한 미술관에 들어서야 만날 수 있는 것, 천문학적인 가격 탓에 극소수의 부유한 사람들만 소유하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쌓은 애호가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오랫동안 신성시되어왔다. 그러나 최근 미술을 바라보는 보편적인 시선과 태도는 이전과 사뭇 달라졌다. 현대미술과 동시대 미술의 부상, 온라인에서 활발히 교류되는 정보 덕분에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지 않거나 내밀한 인맥 관계를 통하지 않더라도 가능성이 점쳐지는 작품을 선점할 수 있게 되었다. 미술품이 조각으로 분할되거나 디지털로 변환되는 파격도 일상이 되어간다. 뉴욕의 유명 갤러리스트이자 컬렉터인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의 말처럼 “미술은 하나의 생활양식”이 되었다. 이달의 토픽에서는 미술시장의 새로운 현상, 그리고 오늘날 미술시장의 열쇠를 쥔 것은 누구인지 등 미술이 마주한 새로운 물음들과 마주해본다.
1-사랑과 투자 사이
2003년 런던에 머물 당시 미술시장에 대해 친구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고가 행진을 이어가던 인상주의 작품들과 근·현대 미술작품들이 비교적 고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피부에 와닿는 미술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거웠다. 경매 현장에서의 내 경험담은 친구들에게 무용담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잠자코 듣던 경제학자 친구가 자못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미술시장에서는 인간이 ‘합리적 선택’에 근거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서 초고가 작품들의 가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산정되는지 물어온 것이다.
“미술품 가격, 누가 책정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며느리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미술시장에는 가격이 있습니다. 환장할 노릇입니다. 누구는 호당 20이고 누구는 30이 됩니다. 1년에 작품한 점 안 팔려도 호당 200만원 하는 원로님도 계십니다. 이곳이 미술시장입니다.”
_박정수, 『아트 앤 더 마켓』 중
유럽의 고대와 중세까지는 미술품이 자발적 동기나 자기 표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막강한 권력이나 부를 가진 후원자와 단체의 주문이나 명령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야 예술가들은 크리에이터creator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이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소유하는 것 또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예술작품들은 점차 심미적, 역사적, 사회·문화·종교적 가치와 의의를 지니게 되었으며,이에 따라 오늘날 위대한 작품이자 문화유산을 소장한다는 것은 큰 영광으로 여겨진다. 천문학적인 값을 지불하면서까지 이를 기꺼이 수집하려는 이들이 생겨나는 이유다.
이제 미술시장은 “자본의 체계 속에서 돈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경제학적 접근 영역으로 이해”되는 변화의 물살을 타고 있다. 『수집의 세계』 저자 문웅은 “지금 미술 투자의 붐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미술을 부동산, 주식 등과 같은 엄연한 투자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미술시장을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까? 『아트 앤 더 마켓』에서 박정수는 “현대 사회에서 유통되는 인문학이 포함된 정신적 상품으로서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미술시장을 구성하는 모두가 문화예술에 대한 경제학적 접근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술사학에서는 예술이 갖는 특수한 미학적, 정신적, 상징적 가치를 들면서 재화의 가치를 측정하고 가격을 산출하는 경제학적 방식이 예술작품에는 적용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저명한 경제학자 브루노 S. 프라이Bruno S. Frey는 『문화예술경제학』에서 예술사와 경제학 간 통섭이 소극적이었던 것에 대해 예술 사학자들이 경제학을 ‘금전적으로 이익이 되어 상업화할 수 있는 예술에만 가치를 둔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경제학은 미술시장과 예술품의 거래, 그 안에서 이뤄지는 투자와 수익의 원리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프라이에 따르면 이러한 연구는 예술시장의 본질적인 특성을 고려해 여타 시장과는 다른 제도적, 행태적 차이를 분석에 통합시킴으로써 상당한 성과와 진전을 얻었다.
“미술품은 과연 상품일까? 미술품 가격은 애초에 누가 결정하는 것이고 어째서 사람들은 거기에 수긍하지?”라는 친구의 질문에 미학적, 미술사학적 관점으로만 답한다면 영원히 평행선을 걸을 수밖에 없다. 경제학적 방식으로는 예술 본연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라이는 “개인은 자신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것을 향유(소비)함으로써 효용을 얻으며, 경제학자는 ‘한계지불의사(marginal willingness to pay)’를 측정함으로써 수요의 크기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술에 대한 수요가 분명히 존재하고, 예술가 개인 혹은 집단적 구성원들의 꾸준한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프라이의 주장처럼, 모든 사람의 선호와 제약 조건이 상호작용하여 이루어낸 균형 상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2-시작하는 컬렉터를 위해
팬데믹 이후 재테크의 열풍 속에서 부동산과 주식, 가상화폐에 이어 미술품이 후보로 조명받기 시작했고, 아트테크Art-Tech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투자를 중심으로 과열된 미술시장의 분위기를 두고 한 쪽에서는 작품이 단순히 가격에 따라 서열화될 것을 우려하고, 혹자는 미술 자체의 가치를 왜곡하고 훼손시킨다는 부정적 견해를 제기한다. 그러나 예술 창작이 지속되려면 자본의 뒷받침 또한 필수 불가결하기에 최근 미술시장의 새로운 활기에 대한 긍정적 전망도 다분하다. 미술계는 발 빠르게 다양한 온·오프라인 전시회나 소액으로도 그림을 구매할 수 있는 아트페어 등을 선보이며 신규 컬렉터들의 진입을 독려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나도 한번 컬렉터가 되어볼까?’라는 호기심이 피어오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교양 있는 취향을 기르기 위해서든, 성공적인 투자를 위해서든 미술품을 구매하고 수집하려면 우선 미술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접촉이 지속되다 보면 예술이 안겨주는 감동이나 충격과 조우하는 우연이 생길 수도 있고, 이로 말미암아 삶이 윤택해지는 기쁨을 누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 이전에 열성적인 미술품 수집가였던 괴테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수집가”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사회학자인 레이몽 물랭Raymonde Moulin은 미술품 소비자 유형의 기준점을 오래 전에 제시했습니다. 미술품 소비자가 소비하는 행위는 대체로 미술품을 실용적인 목적보다 정신과 감각이
작용하여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인간의 산출물로 보았고, 이를 ‘고유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그들은 ‘미술애호가’로 불리기를 선호하면서, 미술품에 ‘애정’을 갖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 미술평론가인 로저 프라이Roger Fry는 미술품이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목적 그 자체이며, 미술을 통해 상상 활동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고, 결국 미술품은 사람들이 필요한 감정을 채우는 개념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를 ‘opifacts’로 정의했습니다.”
_조명계, 『아티스트로 살아남기』 중
3-그림을 보는 눈
사람들은 예술작품 앞에서 다양한 반응과 표현을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도 약간은 정형화된 것 같다. 말없이 작품을 응시하거나, 약간의 미소 혹은 묘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기도 한다. 작품에 반감을 표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있다. 어떤 이들은 오디오가이드나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진지하게 배우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왜 우리는 이토록 그림을 이해하고 싶어 할까? 언제부터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운 숙제가 되었을까? 그림은 무엇이고 우리는 이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 걸까?
대학교 1학년 때 예술학과의 드로잉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그림으로 그린 뒤 직접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학생이 파란색과 보라색을 사용한 자신의 그림을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우울과 깊은 슬픔을 고백하고, 동생이 지난밤에 이 그림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더니 자신을 안아주었다는 예술적 무용담을 털어놓았다. 꽤 멋진 이야기였지만, 듣는 내게는 작품과 감상자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명을 듣기 전까지 나는 그 그림에서 그러한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명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란 좋은 예술일까? 작가의 해석을 들은 이후 달라지는 감상자의 감정은 진짜일까? 어쩌면 예술가에게 실력보다 언변이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예술가를 꿈꾸던, 어쩌면 교만하게 남의 그림을 판단했을 수도 있는 풋내기였던 나는 작품과 작품을 둘러싼 해몽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댄 길로이Dan Gilroy감독의 영화 〈벨벳 버즈소(Velvet Buzzsaw)〉는 갤러리, 아티스트, 커미셔너, 평론가가 주축이 되는 미술시장의 현주소를 풍자한다. 매우 폐쇄적인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 이들은 예술작품 앞에서 여러 의견과 느낌을 교환하는데, 그들의 대화에서 시종일관 타인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거만함이 느껴진다. 거기다 작품의 가치가 유명 평론가에게서 호평을 받는 즉시 급상승하기에, 일부는 작품 가격을 올리고자 모종의 거래를 하기도 한다. 이 장면들이 모든 미술 전문가와 관계자들의 행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류 미술 세계에 항상 따라다니는 한없는 신뢰와 존경, 찬사, 호의적 탐구 등 작품을 둘러싼 말들의 은근한 영향력은 영화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그들의 심오한 예술세계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에 돈이라는 숫자가 매겨진 후 나타나는 경향과 트렌드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낸다.
‘그림 보는 눈’은 무엇일까? 예술의 보다 역사적이고 거시적인, ‘객관적’ 의미를 알면 그림을 잘 보는 걸까? 시대마다 미술의 정의와 역할은 달랐다. 기원의 상징, 종교적 사물, 기록, 중요하
거나 중요하지 않은 장식으로 존재해왔다. 현대미술에 들어서는 철학과 개념을 파고들거나 심지어는 투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여러 의미와 역할을 바꿔 입으면서도 예술에는 오랜 시간을 관통하는 한 가지 의미가 있다. 어찌 됐건 미술이 각 시대를 반영해왔고, 그 시대를 이룬 구성원들의 모습이나 욕망, 철학이 작품 안에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시적인 의미를 알아채도 밀도 있는 감상에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림을 보는 통찰력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나 철학적 사고만 가지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이 나에게 의미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스스로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술이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취향은 곧 사회안의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림 보는 눈’을 키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수많은 다른 눈들이 인정하는 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과 ‘내 눈’의 찐한 만남 자체인지도 모른다. 남들에게 그럴듯한 해몽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작품을 만나는 것. 그리고 꾸준한 관심과 그에 따른 경험치가 쌓일 때, 비로소 자신만의 안목과 취향이 만들어진다.
“자신이 소비하는 문화에 관해 말하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를 자기도 모르게 은근히 드러내는 행위일 때가 많다. 우리가 즐기는 것에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가 반영되는 것이다. 나는 현재 나의 음악 취향을 친구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그러니까 ‘너 이건 꼭 들어봐야 해.’ 하고 말하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이면 늘 움찔한다. 친구는 의무감에 그 음악을 듣게 되고 나는 내 영혼 자체가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무언가를 칭송하는 것보다는 혹평하는 것이 언제나 더 안전하다.”
_그레이슨 페리, 「민주주의는 취향이 후지다」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