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1923년 6월 화창한 어느 날, 두 사람이 각자 다른 동선으로 런던을 걷고 있다. 그들의 이름은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 이들은 거리를 걸으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홀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이는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내용이다. 두 사람의 실제 동선뿐만 아니라 현재와 과거,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된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런던 산책은 휴식 이상의 입체적인 여행 경험이다. 거기에 현대 ‘런더너’가 그린 그림까지 더해지니, 우리는 그저 산책에 나서기만 하면 된다.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는 건축물을 지나 19세기 대영제국의 화려함 속으로. 그리고 이곳에 살았던 수 많은 사람들의 내밀한 이야기 속으로.
52세 중년의 여인,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타고난 사교적 본능을 지닌, 존경할 만한 보수당 남편의 ‘완벽한 안주인’이다. 그녀는 상류층 사회에 걸맞다고 여겨지는 관대하고 온화한 모습을 지키면서도 삶의 소소한 기쁨들을 아끼며 살아간다. 그녀를 사랑했던 피터 월시는 그녀가 삶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안다고 평가하지만, 한편으로는 파티로 시간을 허비하며 고상하고 새침한 척하는 속물 같은 사람으로 여긴다. 영 틀린 판단은 아니다. 클라리사는 삶의 가치를 대단한 이상에서 찾지 않는다. 크게 달라지는 것 없는 일상에서의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것에 기쁨을 느낄뿐이다. 일정한 시간마다 묵직하게 울리는 빅벤의 종소리에 긴장하는 그녀는 이곳 런던을 몹시 사랑한다.
인플루엔자를 앓았던 클라리사는 건강을 되찾은 기념으로 저녁 파티를 계획하고, 파티를 위한 꽃을 사러 아침 일찍 본드 거리로 향한다. 그렇게 그녀의 산책은 런던의 심장, 웨스트민스터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맑은 바깥 공기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곤 알링턴과 피커딜리 거리를 거닐다가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서 “신성한 생명력의 흐름”을 경이로워하고, 창문 너머 이웃집 노인을 관찰하며 보통의 삶을 추앙한다. 현재에 충실하는 클라리사는 지나간 일들이나 노화, 죽음 등 흔히 삶의 그림자라고 여겨지는 것에도 태연하다. 꽃집에 가는 내내 자신의 어리석음, 사랑과 죽음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본드 거리에 도착하자, “그게 전부야”라는 혼잣말로 끝없이 이어지던 생각을 마무리한다.
같은 날, 클라리사의 낯모르는 이웃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는 꽃집이 자리한 본드 거리 건너편 어딘가에 멈춰 서 있다. 그는 어떤 목적에 눌려있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는데,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 길 한복판에서 꼼짝도 못 하는 중이다. 30살 정도로 보이는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살아 돌아뒤, 죽은 상사 에번스의 환영에 고통받고 있다. 그에게 ‘전쟁이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말은 부족하다. 전쟁 이후 그에게는 삶은 좋고 죽음은 그렇지 않다는 충격만 남았기 때문이다. 셉티머스는 아내 루크레치아를 피난처 삼아 스멀스멀 올라오는 허무주의를 간신히 회피하고 있다. 런던은 그가 시인의 꿈을 안고 정착한 도시였지만, 예민한 감수성의 그에게 런던이 안겨준 것은 결국 실망감과 궁핍한 상상 속의 삶뿐이었다. 이처럼 삶의 의미가 충족되지 않았던 셉티머스에게 삶에 들이닥친 전쟁은 환청과 함께 삶의 목적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남겼다.
아내와 팔짱을 끼고 함께하는 셉티머스의 산책은 의사의 처방에 따른, 세상에 관심을 갖기 위한 노력이다. 그런데 런던을 포함해 변화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그에게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반지가 없는 아내의 손가락을 보며 자신이 영원히 버려졌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아내가 야위어 반지가 커진 탓인데 말이다. 생존과 죽음이 지배하는 전쟁통에서의 깨달음을 종이에 옮겨 적고 있지 않을 때에는 그도 세상의 아름다움에 감동한다. 그러나 셉티머스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놀람 때문에 눈을 조심조심 게슴츠레하게 뜨곤 한다. 그는 삶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자신이 세상에 대해 느끼는 것을 표현하면 할수록 오히려 아내의 걱정과 의사의 참견을 사서,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여기기에 이른다.
『댈러웨이 부인』은 삶에 대한 긍정에서 파생되는 인생의 스펙트럼을 돌아보게 한다. 런던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팬들을 위해 마련된 소설 속 클라리사와 셉티머스의 동선을 그대로 따라 걷는 워킹투어도 찾아볼 수 있다. 작가 나츠코 세키Natsko Seki의『루이 비통 트래블 북』 〈런던〉 편에도 클라리사가 걸으며 옛 애인 피터를 떠올린 세인트제임스파크, 셉티머스가 비행기를 목격한 리젠트 공원, 꽃집이 위치한 본드 거리, 빅벤 등을 포함한 소설 속 배경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콜라주로 런던의 명소들과 곳곳의 디테일을 재치 있게 표현한다. 건물의 묘사가 특히나 인상적인데, 실물과 근접한 드로잉은 고풍스러운 건물들의 각진 외관들을 그대로 옮긴 듯하고, 부드러운 연필 선과 색채는 따스함을 얹어 낯익은 분위기를 더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일러스트 속 하늘을 덮는 푸른색은 포근하게 모두를 반겨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