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언제나 추억 속에서 더 아름답다. 막상 여름을 살고 있으면 더위와 인파에 치이느라, 설레는 에너지를 망각하니 말이다. 모든 계절이 다 나름대로의 의미와 기쁨이 있지만 여름의 기억은 유독 더 반짝거린다. 어릴 적 기억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찬란한 태양빛 때문이었을까, 일렁이는 파도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까닭일까. 화려한 색감의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 때문일 수도 있겠다. 바다 앞에 서서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수영하고, 종일 해변을 거닐며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던 때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그나마 최근에는 주로 그림책을 통해 여름 바다의 모습과 휴가의 여유로움을 상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 같다.
『여름 안에서』는 휴양지의 하루를 시간대별로 그려 그곳의 특별한 공기를 발산한다. 흥미진진한 모험이 기다려지다가도 어느새 지루하고 느리게 흐르는 시간,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 후덥지근한 날씨 아래 나누던 나른한 대화들…. 이렇듯 책은 기억 속 어느 휴양지에서의 순간을 다시 살게 만든다. 삶의 터전인 동시에 휴가지인 바닷가는 매일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의 퍼포먼스가 이른 아침부터 펼쳐진다. 새벽 5시, 해가 떠오르고 갈매기가 날아오르면 어부들이 모래 위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바다로 나간다. 8시쯤 어부들이 돌아오면 해변은 신선한 생선들과 사람들로 가득한 어시장으로 변한다. 팔고 남은 생선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개나 고양이, 갈매기들의 차지! 이후 텅 비는가 싶더니 이제는 피서객들이 해변을 점령하기 위해 몰려든다.
태양빛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사람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어 부드러운 바닷물의 일렁임을 느끼며 걱정과 근심을 씻어낸다. 어느새 해변은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찬다. 수영복 모양도, 사람들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책 읽는 사람, 평화롭게 낮잠 자는 사람, 칵테일을 마시는 사람, 까르르 웃으며 수영하는 사람,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 점점 해가 기울고 파란 바다와 하얀 모래 위로 노을빛이 내려앉으면, 사람들은 하나둘 짐을 챙겨 해변을 떠난다. 핑크빛 하늘에 마음을 빼앗겨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는 밤 깊은 바다를 더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모일 차례. 시원한 맥주를 들고 찾아와 삼삼오오 자리 잡고 앉아 무슨 할말이 그리 많은 지 밤새 이야기꽃을 피운다. 대학생 때 친구들끼리 바닷가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초저녁 즈음, 20대 초반의 남자들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희랑 같이 한잔하실래요?”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지만 속마음이 들뜬다. 이름이 뭐냐고 묻는데 한 친구가 갑자기 장난을 친다. 은경이, 수연이, 태원이, 정미, 인경이를 은자, 수자, 태자, 정자, 인자로 바꾸어 말해준다. 그러자 한 남학생이 인자로 이름이 바뀐 인경이를 바라보며 “참 인자하게 생기셨네요”라고 시시한 농담을 건넨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잘 안 통해서 였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금방 파하고 민박집으로 돌아와 우리끼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해변에서 만났던 남자애들 이야기로 한참을 까르르 웃었다.
바다는 너무도 다양한 추억의 장소다. 어린 시절 가족과, 친구들과, 연인과, 강아지와, 그리고 혼자서 찾을 때마다 매번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지난 몇년간 나는 바닷가 사진이나 그림책을 보며 많은 위안을 삼았다. 많은 책들이 황홀한 여행지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그런데 이번 휴가만큼은 좀 다를 예정이다. 상상 여행 말고, 정말로 떠나라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이번 여름엔 기필코 바다로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