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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21

어떤 연애의 무게

글.서예람

내 맘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시간과 몸뚱이 하나뿐이라 믿고 살아온 빡빡한 사람. 갈수록 몸에 의해 시간이 많거나 적어질 수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와 다른 몸들과 그들의 삶, 주변이 궁금하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
천자오루 지음
강영희 옮김
사계절

연애는 좀 가볍고 즐거운 게 좋다. 많은 사람들이 ‘연애와 사랑은 다르다’거나 ‘결혼은 연애와 다르다’고 선을 긋는 걸 보면, 연애에 있어서만큼은 그저 즐겁고 싶은 사람이 나뿐은 아닌 듯하다. 애인끼리 아껴주고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언제든 아니다 싶을 땐 그만둘 수 있는, 약간은 불안정한 기반 위의 헌신이라서 연애가 더 좋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벼울 지언정 연애는 중요하다. 누군가를 만나 정을 나누고 시간을 쌓으면서 두 사람 각자가 이루는 성장은 꽤 크다. 다만 그 달콤한 시작이 가벼울 뿐. 감정 이후의 연애 과정과 ‘어떻게’ 관계 맺지는 당사자의 성장과 변화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항상 중요하고 꼭 즐겁지만은 않다. 그래도, 그 시작과 존재만큼은 다소 대책 없어도 예쁘게 용서되는 것이 일반적인 연애다.
반면 장애인의 연애와 사랑은 절대 가벼울 수 없는, 대단한 결심에 의한 것으로 섣불리 판단된다. 휠체어를 탄 여성 유튜버 ‘구르님’의 채널에 올라온 동영상 중 서로 다른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연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클립이 있다. 거기서 지체장애, 청각장애, 시각장애를 가진 세 명의 여성 장애인이 한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는, 자신들의 연애를 불가능한 것을 이루려는 대견한 일이나 세기의 사랑으로 여기는 호들갑이 지겹다는 것이다. ‘장애인의 성과 사랑 이야기’라는 부제를 가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은 무겁고도 가벼운 장애인의 연애생활에 관한, 아마도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 있는 여러 주제들을 다룬다. 저자가 만난 장애인들은 부모조차 자기 애인을 데려오면 ‘왜 그런 힘든 길을 가려 하느냐’며 어쩔 줄 몰라 한다는 말을 전한다. 그들은 자신을 누군가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독립된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는 부모나 가족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연애에 있어서 장애인이 가지는 애로사항에 관하여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그저 무성애적인 존재로 치부되는 현실에 이 책은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더불어 남성 장애인과 여성 장애인에게 허락된, 혹은 그들 자신이 허용된다고 느끼는 연애나 성생활의 범위가 다르다는 점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대만에서 쓰인 이 책에 따르면, 장애인 남성의 경우 부모들이 더 가난한 나라의 여성을 데려와 결혼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들 외국인 여성은 싫든 좋든 자기 나라를 떠나와서 처음보는 남성과 결혼하여 그의 생활을 돕는 것은 물론, 자손도 낳아야 한다. 반대로 여성인 장애인이 애인을 데려오거나 결혼을 말할 때는 상대의 부모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부모조차도 만류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뿌리 깊은 성차별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여성에게 더 무거운 결혼 제도와 연애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내는 반드시 남편과 미래의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노동력을 갖추어야 한다. 때문에 신체 기능이 손상된 여성 장애인은 무능한 여성이라는 딱지와 함께 사회가 기대하는 아내와 어머니 역할에 실패한 여성이라고 쉬이 여겨진다. ‘돌보는 사람은 의존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가치관은 가정에서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이 겹쳐서는 안 된다는우리 사회의 생각을 드러낸다.”
아주 편하지만은 않은 이 책은 더 나아가 누구라도 불편해질 법한 이야기를 꺼낸다. 장애인의 자위나 성경험을 돕는 시민단체나 성구매 이야기가 그것이다. 누군가는 장애인을 상대로 한 성폭력이나, 장애인이 누군가에게 성적수치심을 가한 사례를 들면서 성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기보다는 성욕 자체를 부정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런 교육이나 고민 없이, 없는 체하고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일어나지 않았어도 될 일을 키운 원인이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간단치 않다.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그저 바라기로는,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장애인들에게도 연애가 그저 가볍고 즐거운 것이면 좋겠다. 다만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성구매나 연인 간의 폭력은 절대로 가볍지 않은, 중차대한 것이어야겠다. 이 책에 자신의 가장 내밀한 경험을 공유한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