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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9
어디에서 살고 싶나요?
Editor. 최남연
여름이면 제습기, 겨울이면 가습기를 틀며 집안 습도를 관리하기 바쁜 7년 차 자취인.
극세사 이불, 그냥 이불, 여름용 홑이불까지 필요한 한국의 사계절 너무 싫어요.
누구나 지금 여기 말고 더 나은 곳, 더 멋진 곳에 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내 방이 넓은 집, 주차할 자리가 넉넉한 집, 아니면 서울은 차가 너무 많으니 차 없는 한적한 곳, 미세먼지 없는 공기 좋은 곳, 아이 키우기 좋은 곳 등등….
조금 더 범위를 넓혀 보면 빈부격차 없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거나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사는 세상 같은 상상도 가능하다. 이처럼 내가 살고 싶은 곳, 만들고 싶은 나라나 공동체가 떠오른다면 그곳은 당신만의 ‘이상 사회’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홍길동의 ‘율도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1800년대에 이미 자신이 꿈꾸는 이상 사회로 성 평등한 공동체를 주창한 이가 있으니, 샤를 푸리에라는 프랑스 철학자다. 오늘은 그의 사상과 그가 꿈꾸던 이상 사회 ‘팔랑스테르Phalanstere’를 소개해볼까 한다.
우선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려면 ‘여기’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푸리에는 1772년에 태어나 1800년대 초중반에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던 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그는 겉으로는 신분제가 폐지됐지만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해 노동자를 억압하고, 여성 역시 제대로 된 권리를 얻지 못한 채 열악한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문명’에 회의를 갖는다. 그리하여 푸리에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문명 비판, 인간 본성 옹호’가 되고, 팔랑스테르의 주된 목표는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감정, 욕구, 특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다양하고 질 좋은 음식으로 하루 5끼를 제공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푸리에가 ‘문명의 악덕’으로 지적한 것은 상업, 도덕, 학문이다. 나머지는 각자 책을 읽어 보기로 하고 도덕에 대한 얘기만 함께 짚어보자. 그가 보기에 문명사회는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진실한 감정을 억압하고 위선만을 증대시키는데, 특히 변화무쌍한 인간의 감정을 억누르는 일부일처제식 결혼제도를 비판한다. 푸리에는 결혼한 부부가 단조로움과 권태 속에서 겪는 불행 15가지(162쪽)를 제시하며 완벽히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사랑을 옹호했다. (그래서 책 제목도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다.) 푸리에는 결혼제도가 둘 모두의 본성에 대치되지만, 특히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제도라고 봤다. 결혼제도 안에서 “남성은 여성을 획득하고 소유하며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종의 재산으로 간주하며 원시적 교환의 대상”으로 삼는데, 푸리에는 이 상황을 ‘노예제’라고 표현하며 “결국 문명으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존재는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각종 사회적 진보와 시대 변화는 자유를 향한 여성의 진보에 따라서 이루어진다(131쪽)”고 말하며 여성의 위치가 곧 그 사회의 진보 수준이라는,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제 팔랑스테르를 조금 둘러볼 차례인데, 이름은 밀집대형을 뜻하는 팔랑크스phalange와 수도원을 뜻하는 모나스테르monastere를 합쳐 만든 말이다. 의미 그대로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함께 모여 사는 자급자족 공동체다. 푸리에는 조화를 중요시하고 인간에게 810가지 특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곳에는 여성과 남성 각각 810명씩 총 1,620명이 산다. 푸리에의 믿음대로 완벽히 자유롭고 유동적인 관계 맺기를 보장하며 동성애도 가능하다. 또, 인간의 감정은 변화하고 같은 일을 계속하다 보면 지쳐 열정을 잃게 되니 2시간이 지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본인이 선택한다.
푸리에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학자다. 나 역시 그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사상사 수업을 들을 때 처음 만났다. 한 학기 동안 자유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같은 것들을 배우고 전체 내용이 시험 범위이던 기말고사 날, 문제는 딱 하나였으니 “그간 배웠던 사상가들의 주장을 종합해, 이상 국가를 만들어보세요. 영토, 인구수, 경제와 정치 체제, 안보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등을 상세히 기술하세요.” 어찌어찌 서울만 한 크기에, 인구는 1,000만 명 정도인 간접 민주주의 국가 하나를 한 시간 만에 건설하기는 했는데, 시험장을 나서고 나니 며칠 뒤까지 여운이 진하게 남았다. 이상 사회라는 말은 ‘이상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인지 약간은 남 일 같거나, 불가능 또는 비현실적인 지향점같이 들리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나 역시 기말시험 전까지는 막연하게만 더 평등한 세상, 나아진 세상을 바랐던 것 같다. 그러다 구체적으로 어떤 체제로 나라를 운영하고 부를 어떻게 분배할지 한번 써보고 나니, 이상 사회를 향한 상상이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닌, 실천 가능하고 현실적인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나는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산업 재해로 사망한 이의 유가족은 ‘목숨값 귀한 나라’를 꿈꾼다. 장애인들은 ‘이동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시위한다. 여성들은 ‘성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투쟁한다. 다시, 나는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또, 어디에서 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