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잠들고 나면 스트리밍 서비스로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최근에는 드라마 〈더 크라운(The Crown)〉 시리즈를 정주행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1952년 런던의 그레이트 스모그 사건 당시 끔찍한 대기오염에 속수무책이던 절망적인 상황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내려앉은 스모그와 이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황사와 미세먼지, 그리고 바이러스의 출몰로 마스크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더욱 공포스럽게 겹쳐졌다. 60년 전의 지구는 이미 환경오염의 대가가 매우 엄혹하다는 것을 알려주었건만, 우리는 어째서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까?
회색 도시의 푸른 변화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란 제목의 책을 펼쳤는데 눈앞에는 나무 한 그루 없는 회색 도시가 나타난다. 정원은커녕 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 제목과는 정반대의 풍경에 의아해졌다. 공장과 주택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도시 전체와 하늘에 회색을 덧칠하고 있다. 그런데 황량한 도시의 한 구석, 사다리를 놓고 커다란 포스터를 붙이는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도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정원 꾸미기 대회’라는 그 문구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데, 여기에 대상 수상자에게 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까지 적혀있다. 상금이 목적이건, 자기만의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싶어서건 저마다 다른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고, 많은 이들이 식물을 키우거나 꽃을 가꾸게 되자 도시에 이전과는 다른 생동감이 돌기 시작한다.
작지만 분명한 변화의 조짐이다. 아무것도 없던 아파트의 창가와 발코니에는 화분이 걸리기 시작했고, 고층 건물의 옥상에 정원을 꾸미자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작은 숲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디든 작은 공간이 있는 곳은 꽃과 식물이 자라는 정원으로 탈바꿈했다.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던 사람들의 생활도 달라졌다. 주차장에 불과했던 공터는 어린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이자 이웃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공원이 되었다. 또 하나 크게 달라진 게 있으니, 바로 하늘이 다시 푸른 빛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겁게 내려앉을 것만 같던 회색 연기는 걷히고 낮에는 맑은 파란색이, 밤에는 은빛 달과 반짝이는 별이 가득하여 아름답다.
마침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꼽아 시상하는 날이 되었다. 대상 수상자가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솔직한 기대와 함께 사람들의 발길이 모여든다. 독자인 나조차도 대상 수상자가 누가 될지 매우 궁금해진다. 이윽고 대상의 주인공이 발표되고, 자리에 모인 시민들은 진심으로 큰 축하와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던 나는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았다. 갑자기 등장한 대상 수상자의 정원을 책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숨겨놓았던 것일까, 싶어 다시 맨 첫 장으로 돌아가 꼼꼼하게 살펴보고 나서야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 눈을 탓하게 됐다. 만약 단번에 가장 아름다운 정원의 주인공을 맞췄다면 당신은 글과 그림 모두를 꼼꼼히 살핀 성실한독자로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나처럼 갸우뚱했다 하더라도 다시 한번 책을 찬찬히 훑을 기회를 얻은 것이니 너무 실망하지는 않기를!
자연스럽고 여유롭게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루카 토르톨리니Luca Tortolini가 글을 쓰고, 건축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AOI 어린이도서상’, 상하이 국제어린이도서전 ‘황금바람개비
상’을 수상했으며 볼로냐 아동도서전 일러스트레이터 전시에 초청받은 베아트리체 체로키Beatrice Cerocchi가 그림을 그렸다.이 책은 처음 읽었을 때와 두 번, 세 번 읽을 때 그림과 글로부터
알 수 있는 정보가 달라지고, 그만큼 감상도 다채롭게 변한다. 다양한 꽃들을 강렬하게 그려낸 표지 그림은 저절로 손이 가게하는 마법 같은 힘을 가졌다. 꽃 그림이라 하면 으레 파스텔 계열을 주색으로 하여 청초하게 그리는 것이 보통인데, 베아트리체 체로키는 높은 채도의 색감을 활용해 선명하고 생동감 있게 식물들의 에너지를 담아냈다. 구불구불 자란 등나무의 덩굴 가지와 흰색, 라벤더, 보라색 꽃잎이 조화를 이루고, 키가 큰 꽃대에 종처럼 생긴 꽃들이 올망졸망 올라붙은 디기탈리스도 눈길을 끈다. 란타나는 꽃줄기 끝에 작은 꽃들이 빽빽하게 자라 꼭 별 뭉처럼 보이고, 작은 해바라기가 한들거리는 모습은 더운 여름날 땀을 식혀주던 향긋한 바람을 떠올리게 한다.
도시 곳곳에 정원과 공원이 조성되어가는 과정을 정답고 친절한 이야기로 그려낸 루카 토르톨리니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변화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게 그는 스토리라인의 방향을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책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을 스스로 관찰하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충분한 여유와 기회를 주려는 의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