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rch, 2021

아이 앞의 생

글.김정희

꿈꾸는 독서가. 책을 통해 세계를 엿보는 사람. 쌓여가는 책을 모아 북 카페를 여는 내일을 상상한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아이를 기르다 보면 내 안의 화, 이기심, 잔인함을 마주하게 된다. 밑바닥의 나는 내 멋대로 상상하고 기대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그 화살을 아이한테 돌려버리곤 했다. 간혹 이성을 잃은 듯 화를 내고 난 다음엔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왜 소중한 내 아이에게 다른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끔찍한 모습을 보이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유는 간단하고 비겁했다. 아이가 나보다 약해서.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를 군림하려 들었다.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계획하기 전에 아이의 의사를 물어봤는지, 아이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면 아이에게 충분히 설명은 했는지 되돌아봐야 했다.
반면 아이는 내게 어찌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지 모른다. 밀어내도 내게 다가오는 아이를 보면서 아이에게 부모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라는 것을 느낀다. 아이는 엄마를 부정할 수 없다. 엄마를 부정하면 자기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작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인 열 살배기 모모도 그런 아이다. 모모의 세계는 자신의 유일한 양육자, 로자 아줌마다.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난 모모는 매춘부였던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진다. 그런 모모의 주변에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살고 있다. 창녀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유대인 의사, 혼자 사는 아랍인 할아버지, 전직 권투선수였던 성전환자 등 대부분 외롭고, 늙고,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다. 프랑스 땅에서 살아가는 비주류인의 남루한 생을 통해 모모는 처음 세계와 만난다. 언뜻 모모에게 주어진 사회는 거대한 폭력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모모는 로자 아줌마의 믿음과 사랑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온기를 잃지 않는다.
모모는 자신이 사실은 열네 살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생애 처음으로 주체적인 선택을 내린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세계였던 로자 아줌마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 좋은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녀가 가장 만족해했던 모습으로 생의 마지막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모모는 따뜻한 여성, 나딘을 알게 되고 그의 가정에 속하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신뢰로 아이의 세계가 완성되고,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딘 부부는 모모를 포용하는 믿음직하고 선한 둥지가 되어주었다. 나딘 부부의 세계는 간혹 내가 내 아이에게 보였던 일방적인 모습과 달리 충분히 수용적인 듯하다. 그래서였을까, 모모는 나딘 부부에게 두서없이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아이가 처음 만난 세계는 자신을 보살펴주는 어른이다. 그 어른과 함께 아이는 세상을 만난다. 스스로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는 아이의 밑바탕이 된다.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이 따뜻하고 굳건한 세계가 되어줘야 아이들도 자신만의 단단한 세계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우리 사회가 그러한지는 분명 생각해볼 일이다. 벚꽃 구경을 나간 어느 봄밤에 차가운 몸을 녹이려 향한 카페 문밖에서 매몰차게 거절당했던 기억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고 비겁했다. ‘노키즈존’이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무례함이나 산만한 행동이 어른들을 방해할 수는 있겠지만 글쎄, 아이라는 이유로 늦은 시각 손님이 없던 가게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경험은 어쩐지 생선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있다.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엄마로서의 문제는 어쩌면 나만의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는 않으련다. 새로운 세계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심에 결국 또 사랑이 깃들어 있을 테니. 모모가 삶에 대한 변화를 갈망하게 된 데에도 사랑이 토대가 되어주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