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ne, 2020

아무튼, 논어

Editor.김정희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김영민 지음
사회평론

대개 우리는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변할 때마다 삶의 변환을 경험한다. 육체적 성장과 더불어 제도 교육 안에서 맞춤 생활을 하던 10대를 거쳐 20대에 들어서서는 자유와 책임을 경험하게 된다. 나의 경우는 그랬다. 깜깜한 동굴 같았던 고3을 지나 맞이한 20대는 주어진 자유의 신선함으로 인해 비로소 폐까지 산소가 들어가는 숨쉬기가 가능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절박하게 미래를 설계하는 일들이 나를 후려쳤다. 인간관계, 사랑, 일, 그리고 자아. 이 모든 게 혼재되어 있던 게 격동의 20대였던 듯하다. 그래서 30대가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모든 것이 궤도에 이른 것 같은 안정감을 느꼈다. 가정과 육아에 에너지를 쏟아 부었던지, 혹은 일과 돈을 쥐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꾸려가는 것에 에너지를 쏟아부었던지, 어떤 방식으로든 30대는 자신이 원하는 삶에 집중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 ‘고생 끝, 행복 시작’ 이런 판타지는 없다. 40대가 되면서, 다시 혼란이 찾아온다. 젊음과 나이 듦의 경계에서, 안정과 지루함의 접점에서, 건강과 노화의 가운데에서 또다시 어리둥절해진다. “젊음이란 내게 더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까?” 하는 당혹감 속에서도 삶은 지속되어야 하기에, 내면의 질문을 바꾼다. “그러면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할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잘 나이 들어갈 수 있는지’를 고민할때, 때때로 엄습하는 삶의 허무를 잘 다뤄야 함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김영민 교수는 “인생의 허무란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보다 맛있는 케이크를 찾아 오늘도 새로 문을 연 제과점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상을 갱신해가면서 허무를 잘 관리해 나가야 한다는 삶의 비법을 참으로 참신하게 알려준다. 이 책은 우리에게 ‘공자님’의 말씀을 빌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당위를 설파한다기 보다, 현대의 맥락에서 논어라는 텍스트를 풀어가는 것에 충실한 책이다. 책 속 ‘인(仁)’ ‘정(正)’ ‘욕(欲)’ ‘예(禮)’ ‘권(權)’ ‘습(習)’ ‘경(敬)’ ‘지(知)’ ‘성(省)’ ‘효(孝)’ ‘무위(無爲)’ ‘위(威)’ ‘사(事)’ ‘재현(再現)’ ‘교학(敎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서 윤곽을 잡아가던 가치관들을 확인하게 되거나 혹은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명쾌한 처세법을 알게 되는 의외의 경험을 하게 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저 높은 곳에 홀로 있는 성인의 모습이 아니라, 고민하는 내 옆에서 조언을 속삭이는 현실적 조력자 같달까. 그것은 저자의 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꿀 송편과 콩 송편의 대립에서(의의로 삶에선 이런 사소한 논쟁도 말이 된다. 탕수육 찍먹과 부먹의 논쟁처럼 둘 모두를 인정하되 고기 송편을 제 안하면서 종국에는 고기 송편과 고기 만두의 경계를 흐리고 송편의 존폐를 위협하게 된다는, 현실의 프레임 파괴에 대한 비유는 논리를 따라가다가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좋은 사람을 좋아하고 나쁜 사람을 미워하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비로소 미움을 가진 ‘나’에 대한 자책감과 전인류애적 강박에서 해방될 수 있다. 단, 미움과 사랑의 파국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황과 대상을 명확히 인식하고 수준 높게 공감할 줄 아는 숙련된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숙련된 감수성은 삶과 세계라는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이다. 이는 어제보다 나은 자신을 꿈꾸는 열정적 욕망(慾),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지적 능력과 메타 인지를 통해 미지의 영역이 있음을 아는 신중함과 겸손함(知), 스스로에게 반성의 고통을 부과함으로써 얻는 양심과 성숙(省)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형태일 것이다. 때로는 맞히지 못할지 언정 자고 있는 새를 쏘지는 않는 예(禮)가 사람을 보다 더 나은 사람이게끔 한다. 그것은 이기는 법을 알지만 방법이 옳지 못하다고 여길 때 기꺼이 패자의 길을 택하여 위엄을 득하는 것과 같다. 우유부단한 중용이나 고집스러운 원칙주의보다는 세계의 질서를 종합적으로 인지하여 규범과 규칙을 변주할 수 있는 융통성(權)을 발휘할 수 있어야 진정 삶이라는 파도를 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나’의 삶이어야 할진대, 부단한 반복 훈련(習)을 통해 인생 궤도를 생성할 뿐 아니라 변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성실’을 뛰어넘는다.
그러니까 어떻게 나이가 들어가야 하느냐고?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성실한 묵묵함 속에서 나만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아집에 휩싸이지 않고 유연하게 사고하되, 자칫 부드러운 비겁의 탈을 쓰고 싶어질 때 단호히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 좋음과 나쁨을 정확히 구분하여 선한 것을 지향하고 악한 것을 멀리하며 삶을 아끼고 싶다. 그리고 때로는 한 걸음 물러나 패할 줄 아는 여유와 사랑을 가진 삶을 만들고 싶다. 김형석 교수가 『백년을 살아보니』에서 “사람이 나이 들수록 나무가 자라듯이 지혜롭게 자라야 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세상 사물을 대할 때 좀 더 높은 위치에서 볼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했듯이, 지혜를 가지고 다음 세대의 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 그러면 궁극에는 감정의 동요도 허무도 없이 ‘마음이 욕망하는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이르기를 꿈꿀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