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감을 소유하면 뇌의 저장 용량보다 절대적으로 많은 양의 무언가를 손안에 넣은 듯한 기분이 든다. 우리는 세상을 다 가질 수 없지만 도감을 들여다보는 행위로 그와 흡사한 상태를 맛본다. 도감의 개념도 거기서 비롯한 게 아니었을까. 도감이 현대적 의미의 학술적 기능과 교육적인 목적을 획득하기 훨씬 이전, 어쩌면 도감은 거대한 자연의 일부를 한 권에 넣어 소유할 수 있다는 인간의 조금은 오만한 믿음이 만들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물신숭배를 정당화할 수 있다면 앎이 곧 소유가 되고, 소유가 곧 앎이 된다는 논리를 적용해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도감은 무척 매력적인 지식의 카탈로그인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식물화가, 게오르그 에렛
이름은 생소하지만 그의 그림은 낯익다. 식물학자이자 곤충학자였던 독일의 게오르그 에렛(Georg Dionysius Ehret, 1708~1770)은 그가 활동했던 18세기부터 현재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식물화가다. 그의 아버지는 정원사이자 실력 있는 제도사였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정원사의 도제로 일을 시작한 에렛은 두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일생일대의 전향을 한다. 바로 분류학의 아버지 칼 폰 린네와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은행가이자 동인도회사의 간부였던 조지 클리포트였다. 조지 클리포트는 식물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린네와 에렛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세 사람은 클리포트의 저택에 머무르며 식물을 연구했다. 클리포트의 저택에는 4개의 온실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부유한 주인이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희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열대 식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바나나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린네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여기서 린네와 에렛은 다양한 종과 표본을 함께 연구하고 기록했다. 1738년에는 『클리포트 식물지(Hortus Cliffortianus)』를 완성했다. 린네가 초기에 연구한 자웅 분류법을 그림으로 그린 장본인이 에렛이다. 에렛은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서 계속 활동했다. 송양나무속(属)을 의미하는 ‘에레티아(Ehretia)’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최초의 사진 도감, 안나 앳킨스
18세기 말 영국의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안나 앳킨스(Anna Atkins, 1799~1871)는 식물학자이자 사진가였다. 당시 여자들에겐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지닌 아버지 덕에 앳킨스는 어려서부터 수준 높은 과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화학자, 광물학자, 동물학자였던 아버지의 저서에 쓰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앳킨스는 1841년쯤 카메라를 접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에서는 그녀가 세계 최초의 사진작가였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변에는 유난히 사진과 관련된 기술을 발명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진 기술의 기초가 된 ‘포토제닉 드로잉(photogenic drawing)’ 기법을 발명한 윌리엄 탤보트, ‘시아노타입(cyanotype)’을 발명한 천문학자 존 허쉘이 그녀의 측근들이었다. 포토제닉 드로잉은 감광지 위에 대상을 올려놓고 햇빛에 노출시켜서 이미지를 얻는 기법이고, 시아노타입 역시 같은 원리를 이용하지만 이미지를 청색으로 발색시킨다. ‘블루프린트’라고도 불린다. 앳킨스는 이 기법을 이용해서 자신이 수집한 조류 표본들을 현상했다. 이 푸른 이미지들을 엮어서 책으로 낸 것이 세계 최초의 사진 도감으로 불리는 『영국 조류 사진 도감Photographs of British Algae』이다. 1843년 세상에 나온 이 책은 자비를 들여 만든 일종의 독립출판물이었다. 앳킨스는 텍스트를 손글씨로 작성했고, 현재까지 소재가 파악된 것은 단 17권이며 각기 완성도가 다르다. 이 귀한 도감은 미적으로도 훌륭하지만, 역사성과 더불어 높은 과학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며 경매가는 수십억 원을 호가한다.
최고의 예술은 자연, 자크 케르사슈
카르티에 현대예술재단이 2000년도에 펴낸 『The Hand of Na-ture: Butterflies, Beetles, and Dragonflies』는 곤충을 다룬 도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꼽힌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곤충은 프랑스의 유명 컬렉터이자 갤러리스트였던 자크 케르사슈(Jacque Kerchache, 1942~2001)가 수집한 것이다. 루앙에서 태어난 그는 1959년부터 1980년까지 세계의 전 대륙을 헤집으며 최고의 예술작품들을 발굴했다. 케르사슈는 해박한 예술사적 지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집념으로 유명하다. 그는 아름다운 것이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멀리 떨어지고 위험한 곳이라도 마다치 않고 찾아다녔다.
그가 수집한 곤충들은 이 책에서 마치 한 점의 예술 작품 같은 대우를 받는다.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들이 탐험가들이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진귀한 물품을 진열하기 위해 방을 따로 마련했듯, 페이지마다 각 개체가 소중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사진작가 패트릭 그리가 적절한 빛을 이용해 포착한 딱정벌레, 나비, 잠자리 등 69종의 곤충은 때로 보석같이 빛나고, 수채화처럼 은은하게 퍼진 색감을 펼치기도 하며, 하나같이 완벽한 비례와 조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