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but New: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한발 앞서 밝혔던,
『사상계』

에디터:유대란, 사진:신형덕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이래, 이에 찬동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은 ‘을사오적’이라 불렸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1970년, 당시 부정부패한 한국의 특권 세력을 ‘오적’에 빗댄 김지하의 풍자시가 『사상계』에 실렸다. 이후 김지하 및 『사상계』의 대표와 편집장 등이 구속기소 되고 이 잡지는 정부의 폐간 처분을 받았다. 유명한 오적필화사건이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오적’이라 이름 붙이고, 이들을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묘사한 김지하의 ‘불온한’ 시, 그리고 이런 시를 게재하도록 한 잡지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아니었다. 사상계는 1970년 폐간되었을 당시 지령 205호가 나온, 당시로써 최장의 지령을 기록했던 한국의 월간 종합 교양지였다. 『사상계』는 해방 이후 지식 사회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매체였다.
『사상계』는 6·25전쟁의 막바지에 진영 재편이 마무리되던 시기, 젊은 지식인들에 의해 탄생했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백낙준이 1952년 기관지 형태로 발간한 『사상』을 전신으로, 그의 편집과 함께 국민사상연구원 일을 총괄했던 장준하가 조선민족청년단에서 같이 근무했던 서영훈을 만나 1953년 4월 창간했다. 민족통일, 민주사상, 경제발전, 새로운 문화창조, 민족적 자존을 편집의 지표로 삼았고 여러 특집을 마련했다. 창간호 ‘인간 문제 특집’을 시작으로, ‘문학특집’, ‘현대사상 특집’, ‘자유의 본질·자유의 과제’ 등을 기획했다. 특히 1955년 6월호였던 ‘학생에게 보내는 특집’으로 많은 독자를 얻었고, 이듬해에는 3만 부를 넘게 발행했다. 백낙준, 유진오, 토인비, 박동현 등 당대의 존경받는 인물들을 필진으로 섭외했다. 이로써 대학생을 포함한 젊은 세대를 주 독자층으로 확보한 『사상계』는 점차 자유와 민권에 관심을 표명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사상계』를 들고 다녀야 대학생 행세를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사상계』는 학술논문 발표와 학술적 논쟁의 장이기도 했다. 새로운 논문의 요약문이 실리고, 논문에 관한 토론과 반박이 이루어졌다. 1954년 ‘철자법 개정론’에 관한 허웅, 정경해, 이승녕 등 국문학자들의 논쟁, 대학사회 행정과 관련된 이승녕과 김태오의 논쟁, 양주동의 고전문학 논문에 대한 이승녕의 반박, 황산덕과 백남억 사이의 법학 관련 논쟁이 유명한 예다. 사상계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논문이나 문예물도 모집했고 1960년대까지 수많은 외국 소설이나 에세이의 번역물도 실었다. 이런 특성과 관련하여, 『사상계』를 연구한 김건우 박사는 “명백히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이 결합한 형태였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1958년에는 『사상계』의 첫 번째 필화사건이 일어났다. 함석헌이 『사상계』에 기고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6·25가 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필자는 구속되고, 장준하와 주간 안병욱이 조사를 받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은 구절은 이렇다.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이 없지 않은가?”

전문가들은 『사상계』가 창간 후 초기에 계몽적 성격이 두드러졌다면, 1959년부터 정치평론지적 성격이 짙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이 시기는, 자유당 정권 말기의 부패와, 4·19혁명, 민주당 정권의 탄생과 군정 등 근대사상 정치적 혼란이 어느 때보다 심화되었던 시기다. 특히 4·19는 『사상계 』와 뗄 수 없는 연관어다. 1959년 2월에는 장준하가 ‘무엇을 말하랴’라는 제목의 머리말을 백지로 내보내며 자유당정권의 부정부패에 도전하고, 3·15부정선거 직후, ‘자유의 나무는 피를 마시고 자란다’라는 머리말을 발표하며 혁명을 예고했다. 『사상계』에서 사상적 자양분과 위안을 얻었던 전후 세대가 4·19의 주체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나는 『사상계』를 통해 민주주의를 배우고 비판정신을 깨우쳤다. 또 함석헌, 장준하 선생을 만났다”라고 기고한 바 있다. 『사상계』는 1960년 4월호로 9만7천 부를 찍었다. 한국 잡지 사상 당시까지의 최고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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