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but New: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소시민의 사랑과 좌절,
『서울 손자병법』

에디터:유대란, 사진:신형덕

이상하게 항상 약자에게 끌렸다. 미국의 프로레슬링에 한참 빠져 있던 시절 워리어의 광팬임에도 노장 헐크 호건이 약세를 보이는 날에는 그가 극적인 한판승을 보여주길 바랐다. 심한 부상으로 재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점쳐졌던 피겨스케이터 낸시 캐리건이 돌아왔을 때도 그녀를 응원했다. 약자가 반전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이런 마음은 약자가 선이고, 강자가 악인 디즈니식 구도의 이야기에 길들여진 탓도 있을 테지만, 애초 대등하지 않은 조건에서 시작해야 하는 싸움이라면 결과도 공평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 삶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쩌다가 손에 넣은 『서울 손자병법』 속 세상은 불공평하고, 야비하고, 또 야했다. 책 속 세상은 성적 욕망과 부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으며, 한희작 선생의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유의 세 인물이 욕망의 주체와 대상의 위치를 번갈아가며 욕망과 좌절의 구도를 그려나갔다.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못난이 남자 주인공은 외모부터 많이 억울했다. 심한 곱슬 머리에 뭉툭한 코, 비실비실한 몸매의 그는 배짱도 없고 스펙도 별볼일 없다. 그런데 더 불행인 것은 그런 그도 사랑과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이글이글 끓는다는 점. 그는 성공의 문턱에서 발이 걸리고, 무언가를 쟁취한 순간에도 영락없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못난이를 자주 좌절케 하는 잘난 인물도 자유롭지만은 못하다. 스펙 좋고, 잘 생기고, 눈썹 짙은 이 남자는 자신의 자만심에 혹은 상투성의 덫에 도리어 놀아나기가 부지기수다. 손 대면 베일 듯한 날카로운 코와 도도함이 트레이드마크인 여자 주인공은 욕망의 대상이 되거나, 욕망의 주체로 등장하는 경우에도 이성에 의해 간택되길 유도하는 정도로 행동반경이 제한된다. 그녀 역시 자주 자가당착적 결론에 빠진다.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욕망의 순환 구도 속에서 우리는 소시민의 초상을 본다. 뽕짝가사처럼 통속적인 플롯에는 소시민의 좌절과 애환과 해학이 있다. ‘못난이’ 캐릭터가 침을 튀기며 여자를 꼬셔봤자 잘난 남자가 미인을 채가고, 미인은 잘난 남자에게 못 이기는 척 넘어가주지만, 과거사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잘난 사람이 욕망에 충실한 건 추진력이고, 못난이가 그러는 건 과욕이나 다름없이 비추어진다. 이렇듯 개인의 욕망이 사회적 통념이나 보이지 않는 계급장에 의해 반려되는 현상은 작가가 넌지시 제시하고자 한 현실의 단면일 것이다. 그런 세계에 발붙인 소시민은 항상 약자다.

『서울 손자병법』은 1982년부터 『주간경향』에 연재된 만화가 1987년에 상, 하 2권짜리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다. 198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성인만화의 선두 주자 한희작의 유명작이다. 3S(sex, sports, screen)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1980년대 당시 주간지 독자의 구미에 맞는 성을 다룬 것이 주효했다. 그러나 대중이 한희작의 작품을 유난히 사랑했던 데는, 어떤 예술,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겠지만, 공감대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손무의 병법이 현실에서는 잘 먹히지 않는다는 공감대.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아름다운 이성을 꼬셔보려고 끈질기게 말을 이어가고, 좀 낫게 살아보겠다고 노력하는 웅긋중긋한 소시민들의 모습에서 발견한 넌더리와 애틋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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