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유독 좋아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욕심 많은 임금에게 거짓말쟁이 재봉사가 와서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옷을 만들어주겠노라고 제안을 한다. 완성된 옷이 눈에 보일 리 없지만 임금은 자신의 어리석음이 탄로 날까 두려워 눈에 보이는 척을 한다. 임금을 두려워한 다른 이들도 아주 멋진 옷이라고 칭찬할 뿐, 그가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고 외치자, 그제야 모두 진실에 눈을 뜨게 된다.
풍족하지 못한 가정형편에 늘 옷이 고팠던 나는 어린 마음에 옷장 앞에서 동화 속 임금님을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거짓말쟁이 재봉사가 만든 가짜 투명 옷이 아닌, 마법처럼 사람들 모두가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투명 옷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내 상상 속 투명 옷은 형태도 색깔도 없지만 나의 자유로운 상상을 따라 다채롭게 변화했다. 그런 옷이 정말 있었다면 매일 아침 옷장 앞에서 그토록 고민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날마다 펼쳐지는 놀랍고 멋진 세계
스와힐리어로 ‘건강’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피야는 하얀 원피스 딱 한 벌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원피스는 아피야가 날마다 새롭게 만나는 세상 풍경을 수집하고, 멋진 순간을 담아내는 신기한 옷이다.
아피야가 해바라기 꽃밭을 지나면
노란 꽃잎에 둘러싸인
까만 얼굴의 해바라기가 아피야의 원피스에 한가득 담겨요.
해바라기 꽃밭을 지나면 아피야의 원피스에 해바라기가 가득 담긴다. 온갖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풀밭을 걸어가면, 가느다란 나무줄기며 꽃잎, 나비들의 아름다운 모습까지 모든 풍경이 아피야의 원피스 앞뒤에 그려진다. 비둘기들이 아피야 앞에서 날아오르면 새들의 날갯짓이 무늬가 되어 원피스를 아름답게 수 놓는다. 원피스를 빨아도 그림의 선명한 빛깔은 변함없이 생생하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원피스는 다시 감쪽같이 하얘진다. 매일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원피스인 것이다.
날마다 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흰 종이처럼
깨끗한 원피스가 빨랫줄에 걸려 있어요.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는 사람이 처음부터 죄악 덩어리로 태어난다는 전통적 아동관을 부정하고, 백지상태tabula rasa로 태어나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동이 타고나는 지능이나 기질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지식을 미리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지 않았다. 따라서 부모들이 교육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녀를 선하게도 악하게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피야가 경험하는 매일의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내는 스케치북이자 그림 일기장인 ‘하얀 원피스’는 백지상태로 태어난 한 아이의 성장에 대한 은유이자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자메이카의 대표적인 시인 제임스 베리James Berry는 2017년에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단 한 권의 그림책인 아피야 이야기에는 놀라운 상상력이 응집되어있다. 날마다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고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원피스가 아침이 되면 새하얗게 되돌아온다는 그의 마법 같은 세계는 날마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독자들에게 불어넣는다.
그림작가 안나 쿠냐Anna Cunha 또한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아피야가 세상 속에서 경험하는 매일의 여정을 환상적으로 그려 냈다. 이 책의 모든 장면에서 아피야는 늘 환하게 웃고, 계속 움직이고, 걷고, 춤추고, 높은 곳에 오르고, 탐험한다. 이 그림책을 읽는 독자도 아피야의 원피스에 일어난 환상적인 일들에 대해 다양한 상상력을 펼쳐 볼 수 있고, 동시에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아피야와 같은 경험을 하며 자라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어나를 채웠던 그림들, 채워 갈 그림들
그림책을 읽는 동안 모든 어린이들의 하루가 축복받는 시간이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나의 어린 시절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어떤 풍경들로 내 원피스를 채우며 살아왔을까? 거울 앞에서 있는 자신감 없는 여자아이도 떠올랐지만, 아피야처럼 온 몸을 던져 자연 속에서 뛰어놀던 때도 기억났다.
아피야가 둥글게 솟아오른 바위 사이를 걸어요.
어느새 원피스에 동그란 바위가 하나둘 생겨나요.
아피야는 그 바위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요.
시점을 바꾸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날들을 향해 ‘나의 하루가 원피스에 새겨진다면,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려 넣고 싶을까?’하고 질문을 던져봐도 매일이 특별해진다. 아이들의 웃음,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의 무리, 시시때때로 변화는 구름의 변화,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눈에 들어오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두움이 가득했던 하루였더라도 괜찮다. 새로운 하얀 원피스가 내일의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날마다 놀랍고 멋진 일들이 일어나는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모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세상 전체가 놀랍고 멋진 풍경으로 가득해져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이었어요.
집에 돌아온 아피야는
원피스에 가득 달린 나뭇잎이
후드득 떨어지는 걸 보았어요.
시월의 바람결에 흩날리던 나뭇잎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