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 특별기획

삶과 죽음의 흔적을 간직한 메헬렌시립도서관

에디터. 서예람 사진. 루크 크레이머 © Luuk Cramer 자료제공 Korteknie Stuhlmacher Architecten & Callebaut Architecten and Bureau Bouwtechniek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품은 우리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아 지구에 머무른다. 인간이 만드는 많은 것들이 그렇다. 건물도 예외가 아니다. 큰 재해를 겪지 않고 제 수명대로 산다면 건물은 인간보다 훨씬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머무른다. 덕분에 지금의 우리는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유적들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도시에는 수시로 새 건물이 세워진다. 없던 땅이 생길 리는 없으니, 대부분 있던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다. 이유는 대단치 않다. 조금 낡고 하자가 생겨서, 혹은 건물의 소유주가 바뀌어서. 이처럼 건물들의 짧은 생로병사를 매일같이 목격하는 가운데, 기구한 운명을 가진 한 오래된 건축물이 다시 한 번 목숨을 지켰다. 기획에서 완공까지 무려 8년이 소요된, 두 번의 생과 한 번의 죽음 뒤 새로 태어난 벨기에 메헬렌시립도서관이다.
이 건물의 전생 같은 첫 삶은 프레딕헤렌Predikheren, 즉 도미니크 수도회 산하의 수도원으로 시작됐다. 처음 지어진 때는 1650~1720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수도원의 수명은 길 어야 100년 남짓이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수도승들이 쫓겨났고, 이 건물은 군용 기지로 활용되었다. 사랑과 평화를 수호하는 수도원으로 시작됐지만 현대사의 질곡과 함께 군용막사이자 병원, 무기고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은 냉소적인 농담 같다. 숱한 지역 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기지로서의 한살이도 막을 내렸다. 이 건축물의 상반된 두 삶은 도서관 1층 한켠의 바닥재로 활용된 일부 수도승과 군인들의 묘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75년부터 이 건물에는 아무런 기능도 부여되지 않고 인간의 출입도 없이 방치된 죽음의 시간이 이어졌다. 흔히 건물도 사용하지 않거나 비워두면 못쓰게 된다고 말한다. 도서관으로 재건축 사업이 착수된 2010년까지 45년 동안 죽은 것과 같았던 빈 건물에 이끼, 곰팡이, 온갖 덩굴식물이 터를 잡았다. 그런데 사업의 기획 단계에서 인간 대신 건물에 자리했던 생물들을 일차적으로 걷어내자 놀랍게도 이전 생의 흔적이 드러났다. 전체적인 디자인과 설계를 담당한 코르테크니 스튤마헤어 건축사 Korteknie Stuhlmacher Architecten는 건물에 남아있는 상처와 지난 세월의 모든 이야기들을 껴안는 디자인을 제안했다. 어딜 가든 깔끔한 새것뿐인 세상에 오래도록 튼튼히 서있던 건축물을 재발견하며 설계자들은 놀라움과 고마움을 느꼈고, 이 감정을 건물 전체의 아우라로 승화시켰다.
도서관이라는 새로운 목적에 맞게 한 번 죽었던 건물을 고치되, 이 건물만이 가진 특별한 분위기와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 멋진 목표이나, 그 실현은 쉽지 않았다. 건물의 매 통로와 모서리마다 상태가 달라 섬세한 대처가 필요했기 때문에 설계 이후 시공 과정에서도 많은 것들이 다시 논의되어야 했다. 일례로 2층의 아치형 천장 장식이 있다. 안뜰을 품은 ‘ㅁ’자 형태의 건물 내부는 네 개의 면으로 구성된 통로를 이룬다. 어떤 면에는 천장의 상아색 바로크식 무늬 장식이 잘 남아있는 반면, 다른 면은 장식 대부분이 유실되어 안쪽 벽돌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했다. 이처럼 세월이 남긴 여러 층위의 흔적은 각각 섬세하게 처리되어,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공개되어 있다. 여기 참여한 건축가들은 이 과정이 보존과 적응 사이의 ‘타협’이 아니라, 건물 속의 모든 부조화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한다.
오랜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겉모습과 달리 전체 공간은 매우 현대적인 도서관으로 활용된다. 안뜰과 연결된 1층에는 편안한 자리와 카페가 있어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개인 컴퓨터로 업무를 보거나 일행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흔히 보인다.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의 안뜰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옛날 수도원의 도서관이 위치하던 2층 복도는 비교적 조용히 혼자 공부하기 좋은 열람 공간으로 꾸려졌다. 어린이를 비롯한 시민들은 다락에 위치한 메인 서가의 멋진 목재처마 아래서 책을 살핀다. 메헬렌시립도서관은 건축물의 정체성은 뚜렷하게 드러내지만, 그 안에서 이용자들이 할 수 있는 활동에는 거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 많은 현대 도서관들처럼 교육적이거나 상업적인 방향으로 이용자의 행위를 인도하기 보다는, 다양한 활동들을 장려하면서도 나름의 멋이 있는 지역 문화공간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디자인이 일관되고, 구석구석 광 나는 으리으리한 공간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방치되었던 45년 세월이 없었다면 이 건물이 이토록 특별하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 죽음의 시간 동안 건물에는 기능과 목적을 잃어버리면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그림자가 새겨졌다. 두 번의 생과 한 번의 죽음 모두 메헬렌시립도서관의 이야기이자 가치다. 인간의 구원과 신의 은총을 기도하는 수도원으로 시작해, 죽지 않기 위해 죽여야 하는 전쟁을 위한 군사기지로 활용되고, 쓸모 없어지자 버려졌던 이 건물의 이야기는 인간사의 굴곡과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메헬렌 시 중심부 공원가에 묵직하게 서있는 이 도서관은 희망을 들려준다. 힘든 상황과 어려운 일, 모두 언젠가 빛나는 의미가 될 거라는 희망 말이다.
September21_SpecialReport_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