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존재한다. 시대와 사상에 따라, 개인이처한 사정과 환경에 따라, 수만 가지의 표정으로 나타난다.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의 순간들을 포착해 작품으로 남겼다. 놀라운 것은, 사회 분위기와 시대의 정서가 각기 다르다 해도 사랑을 대하는 표정과 행동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랑의 얼굴을 가졌고』는 다양한 시대의 예술가들이 느꼈던 사랑의 표정을 모은 책이다. 사랑에서 느껴지는 감정들도 제각각이라 그림을 통해 화가의 마음,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등을 함께 유추할 수 있다. 사랑의 감정을 아로새긴 얼굴들을 회화 작품으로 만나보자.
성모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 성 누가
누가복음은 그리스도의 네 복음서 중 가장 나중에 쓰인 것으로,‘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는 수식어를 지닐 정도로 섬세하게 서술되었다. 특히 수태고지를 받은 성모 마리아의 노래 및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는 오직 누가복음서에만 등장한다. 15세기 플랑드르의 거장이자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자인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의 그림 속 성 누가는 아기 예수에게 수유하는 성모 마리아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예수가 태어난 시기에 누가는 태어나지도 않았기에, 이 그림은 시간 상으로는 맞지 않다. 화가는 성 누가를 시공간을 뛰어넘어 환영으로 불러냈다. 작은 종이를 들고 그림을 그리는 누가의 온화한 표정, 그리고 종이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경이와 성모에 대한 존경을 느낄 수 있다.
연인들
풍경을 가장 환상적으로 화폭에 담는 화가는 단연코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이다. 그의 그림에는 언제나 행복과 웃음이 들어있다. 1928년에 그린 〈연인들〉속 남자의 표정은 사랑의 감정에 아득히 빠져 있고, 여자 역시 달콤함에 젖어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 색채, 배경 모두가 두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이 그림은 샤갈이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이루고 결혼해 행복한 생활을 하던 때에 그린 작품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남자의 뾰족한 코와 구불거리는 헤어스타일로 보아 그가 샤갈 자신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샤갈은 그의 아내가 된 벨라와 1909년에 처음 만났지만, 빈민 노동자 계급 출신인 샤갈과 유력한 보석상 집안의 아가씨였던 벨라의 만남은 환영받지 못했다. 이들의 사랑은 1915년, 샤갈이 후원자를 얻은 후 유럽에서 화가로 성공하고 나서야 결혼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헬레릴과 힐데브란트, 터렛 계단에서의 만남
중세 덴마크의 헬레릴 공주와 그녀의 호위무사 힐데브란트의 사랑은 허용될 수 없었다. 좁고 높은 고딕 탑을 오르는 계단에서 공주와 그녀의 팔을 붙잡은 힐데브란트 사이에 애절한 감정이 묻어난다. 힐데브란트는 공주의 동생에게 살해당할 운명이었으므로, 어쩌면 이 장면이 둘의 마지막 만남이었을 것이다. 헬레릴의 일곱 형제는 무사 힐데브란트에게 달려들었고, 눈앞에서 가족과 연인을 잃은 공주는 오열했다. 홀로 살아남은 헬레릴의 남동생은 공주를 성으로 끌고 가 가두었고, 삶의 의미를 잃은 공주는 점점 시들어갔다. 화가 프레데릭 윌리엄 버튼 Frederic William Burton은 10세의 어린 나이에 더블린 소사이어티 스쿨에서 미니어처 수채화에 이미 정통했다. 그는 16세에 로열 하이버니언 아카데미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는데, 〈헬레릴과 힐데브란트, 터렛 계단에서의 만남〉과 같은 곱고 밀도 높은 수채화는 그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다.
파리지앵
그림 속 모델로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을 따 ‘비르지니’로 불리는 이 작품은 알베르트 에델펠트(Albert Edelfelt)의 1883년 작품으로, 사랑에 푹 빠진 여자의 눈빛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1880년부터 1883년까지 그의 여러 그림에 등장하는 비르지니와 화가 사이에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각별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핀란드를 대표하는 예술 외교관이자 명예로운 화가였던 에델펠트 가족들의 반대로 이 사랑은 결국 이뤄지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인 비르지니가 그와 어울리는 계급이 아니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림 속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푹 빠져서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발산하고 있다. 아늑하고 편안한 방 안,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화가의 행복감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바이올렛 부케를 단 베르트 모리조
여성 편력이 심했던 화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앞에 등장한 여인 베르트 모리조는 전통 있는 살롱에 작품을 세 번 출품한 바 있고, 당대의 비평가 파울 란츠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했던 화가였다. 사랑에 빠질 때마다 연인들을 그림에 등장시킨 마네는 이전까지는 도발적인 눈빛과 과감한 신체 노출을 그림에 그려 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의 그림은 모리조를 만난 뒤로 절제된 포즈와 색채의 깊이감을 살리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모리조는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부르주아 상류층이었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여자였다. 어쩌면 마네는 모리조를 성적인 대상보다는 존경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림 속 모리조의 옷에 달린 보라색 제비꽃은 당시 남자들이 에스코트하는 여성에게 흔히 선물하던 꽃으로, 총명하고 강인하면서도 모든 승리를 거머쥔 고결한 여성상, 즉 아테네 여신을 상징한다. 동시에 제비꽃은 제우스의 숨은 애인이었던 인간 여성 이오를 상징하기도 한다. 1874년 베르크 모리조는 마네의 동생과 결혼한다. 이미 결혼한 상태였던 마네였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이들은 평생 느슨히 연결된 채 서로의 곁에 있었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포드 매독스 브라운(Ford Madox Brown)의 〈영국에서의 마지막〉은 인생의 역경을 함께하는 커플의 파트너십을 보여준다. 그림 속 디테일을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이들 부부의 이야기가 잘 읽힌다. 주인공 젊은 부부는 영국에서 호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려 한다. 다시 못 올 고향을 뒤로하고 떠나는 이들의 두려움과 강한 의지가 그림에 표현된다. 부부는 손을 꼭 잡고 있다. 아내의 두툼한 숄 안의 또 다른 손은 아기의 손을 잡고 있다. 실제로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했던 화가는 자신과 아내를 이 그림의 모델로 했다. 그림 속 남자와 여자의 얼굴에는 슬픔, 다짐, 긴장,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