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Report

미국 하와이, 『시선으로부터,』 파라다이스 한 조각

에디터. 정현숙 / 그림. 에사드 리빅 / 자료제공. 루이 비통 © Louis Vuitton / Esad Ribić

십여 년 전, 하와이로 가족여행을 갔다. 열흘 일정으로 계획된이 여행이 성사되기까지는 지난한 설득과 회유의 과정이 있었다. 사연인 즉, 엄마가 전혀 가고 싶지 않다며 한사코 동참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식들의 온갖 감언이설에도 꿈쩍 않던 그녀를 움직인 건 “이제는 우리도 하와이를 하와이 답게 즐겨야 하지 않겠냐”는 아빠의 한 마디였다. 1982년, 스물일곱의 엄마는 홀로 하와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몇달 앞서 유학을 떠난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었던 엄마는 하와이에서 슈퍼마켓 경리로, 기프트 샵 직원으로, 일식당 웨이트리스로 쉬지 않고 일했다. 더러 즐거웠지만 고달픔을 잊을 정도는 아니었고, 삐쩍 마른 몸과 내려앉은 잇몸은 몇십 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다시 찾은 하와이에서 엄마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내내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그녀가 처음으로 크게 감정을 내보인 건 어느 2층 주택 앞이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 집터를 한참 바라보던 엄마는 결국 아빠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모두가 말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낙원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 한번 무너진 천국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 하고.
“우린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낼 거야.”
한국과 미국에 흩어져 살던 일가족 열두명이 하와이로 모인다. 그들의 엄마, 할머니, 시어머니 혹은 장모인 한 사람, ‘심시선’을 기리기 위해서다. 하필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는 건 그녀가 젊은 시절 한 때 살았던 곳이라서다. 전쟁 통에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 남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끝에, 시선은 ‘사진 신부’로 위장해 하와이로 도망치듯 떠난다. 화가의 꿈을 키우며 사탕수수 농장에서 세탁부로 일하던 중, 세계적인 유명 화가의 눈에 띄어 독일 유학길에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화가로 키워주겠다던 당초 약속과 달리, 그는 시선을 장식품 또는 분풀이 대상으로만 여기며 심리적, 신체적 학대를 일삼는다. 시선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독립할 기미를 보이자 결국 그는 비열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응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대중은 이를 두고 삶보다 사랑을 택한 예술가의 아름다운 죽음으로 해석했고, 시선을 오래도록 미워한다.
혹독한 억압과 오해와 차별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 시선은 서울 부암동에 정착한 뒤 전방위 예술가로 살아간다. 두 번의 결혼으로 얻은 네 아이를 키우면서. 미술평론에서 시작해 자신의 삶의 조각들을 쓴 책들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문화계 명사가 된 시선은 당시로서는 도발적이다 싶을 정도로 자유롭고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거침없이 표현하던 그녀는, 1999년에 출연한 한 TV 대담에서 제사를 가리켜 “죽은 사람 위해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는” “순전히 여자만 고생시키는”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 단언한다.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제사를 비롯한 일체의 유교적 허례허식을 거부했던 시선. 그런 어머니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큰딸 명혜가 그동안 안 하던 제사를 올리겠다며 새삼 나선 것은 어떤 까닭에서일까.
“하와이에 대한 기억은 미묘하게 흐릿하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일까? 고된 일을 반복했던 나날들이어서일까? 매일 비슷한 날들이 지속되면 머릿속에 깃발 같은 것이 남지 않는다. 깃발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단편적인 이미지들만이 종종 떠오른다. 침엽수의 침엽이 말도 안 되게 통통해서, 그러면 침엽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했던 그런 짧고 아무래도 좋은 순간들만이. 생생한 조각조각들이지만 그뿐이다.”
엄마의 10주기를 기념하고 싶었던 명혜는 제사를 핑계로 시선의 흔적을 좇아 온 식구를 이끌고 하와이로 향한다. 이 역시 인습에 매몰되고 강요된 절차가 아니어야 하기에, 그는 색다른 제사를 제안한다. 세상에서 제일 특이한 제사의 방식은 이렇다. 기일보다 며칠 앞서 하와이에 도착해 각자 시선을 생각하며 하와이를 여행하고, 그러는 동안 가장 기뻤던 저마다의 순간을 채집해 제사상에 올리는 것.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상 위에 올려진 제수는 가지각색이다. 하와이에 있는 동안 배운 훌라춤, 30분 안에 먹어야 맛있는 도넛, 이동식 조리대에서 바로 구운 팬케이크, 너무 기본적인 거라 다른 사람들이 까먹었을 법한 과일, 무지개 사진, 레후아꽃과 등산화에 박혀 있던 화산석 자갈, 해양 쓰레기로 만든 재생 플라스틱 블록 탑, 레이 목걸이와 하와이 배경의 소설 원서, 서핑 중 채집한 파도 거품, 코나 커피, 시선의 이름을 붙인 산호 다섯 개가 타히티 바다에 심겼다는 증서, 하와이에 살고 있는 새의 깃털까지. 개성 넘치는 그들을 꼭 빼 닮은, 하나같이 의외이거나 범상치 않은 것들이다.
July22_Hawaii_06
Please subscribe for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