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March, 2016
물정을 공유하는 호의적 전략
Editor. 유대란
얼마 전 SNS에서 박유하와 김규항을 둘러싼 논쟁에 관련한 글들을 읽어보다가 포기했다. 관심 있는 쟁점이라 글들을 게시된 날짜순으로 찾아서 읽고, 지적과 지적의 대상이 되는 글을 대조해 읽어보기도 했다.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점부터는 논객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좇아갈 수 없었다. 반박에 반박이 거듭되고 여러 분야와 관점의 근거가 쌓이며, 독해를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용어와 지식의 난도가 많이 높아졌다. 결국 손을 놓았다. 관련 지식이나 지구력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어려운언어가 원망스러웠다.아이가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면, 웃어주는 어른과, 맞아서 쓰러지는 척하는 어른이 있다. 아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쪽을 좋아한다. 웃어주는 쪽도 호의적이지만, 대부분은 그보다 눈높이를 맞춰주는 쪽을 더 좋아한다. 나는 글도 그런 글이 좋다. 글로써 자신이 아는 것을 세상에 내놓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일 테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이 흥미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게,지식을 내놓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사이의 위화감이 들지 않도록 적극적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있는 글. 그래서 가르치기보다 독자와 밀착해서 공유하는 듯한 글이 좋다. 그런 글들에는 호의적 전략이 숨어 있다.
원치도 않는데 엄마가 화장대를 사서 내 방에 들인 적이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귀가한 나는 그 거대한 흉물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꽃무늬가 새겨진, ‘하이그로스’ 소재의 육중한 서랍이 달린 화장대였다. 눈에 익은 그 무늬는 어린 시절 찌개가 끓던 자기 냄비의 표면에, 친구의 신혼집 집들이에서 본 대형 양문형 냉장고에, 남해의 어느 민박집에서 덮었던 밍크담요 위에 새겨졌던 그 꽃무늬였다. 각각은 조금씩 다른 형상이었을 테지만, 머릿속에선 하나로 각인되어 있다. 대야든, 양치용 컵이든, 어떤 군의 필수품이든, 꽃무늬는 항상 구매 옵션의 하나로 제공된다. 궁금했다. 대체 이 무늬는 어디서 와서 나 같은 소비자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건가. 지극히 생활밀착적이고 소소해서 검색 실마리를 고심하다 만 나는 이 의문의 답을 의외의 곳에서 찾았다. 아파트 건축과 역사가 궁금해 보게 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한국 근대 도시민이 꿈꾸던, 혹은 꿈꾸도록 훈련된 아파트가 어떻게 대표적 주거 형태로 자리 잡고, 한국의 시각 문화를 변모시켰는지 다루는 이 책은 아파트를 둘러싼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고찰한다. 저자는 시점과 화자를 넘나들며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한다. 이를테면 아파트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1940년대 태어난 강남 1세대의 목소리를 빌어 세대 간 이해관계가 어떻게 굴절되는지 보여준다. 그런 덕에 독자는 신도시들의 경계를 넘어 거닐며, 밀착된 거리에서 아파트 속 구석구석을 훑는 관찰자의 입장으로, 가장 한국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은 공간의 속내를 들여다보게 된다. 다시 꽃무늬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꽃무늬는 1970년대 중반쯤, 입식 부엌이 늘어나고 플라스틱 소재의 주방 제품이 보급되던 그 시기부터 널리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저자의 추정대로라면, 플라스틱이라는 신소재의 특성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던 당시, 단순명료한 형태를 뽑아내기보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원색의 문양을 넣은 비닐 코팅 기법을 택하는 것이 생산자로서 경제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곡선적인 문양들은 근대 주거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한 모더니티의 획일적이고, 직선적인 차가움을 채 내면화하지 못한 부엌의 안주인들에 의해 수요가 발생했다고. 이쯤에서 나도 꽂무늬에게 조금은 친절하게 말을 걸고 싶어졌다. “그렇게 왔구나. 그랬구나.”
자신의 업이 어떻게 밥벌이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또는 자신이 밥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고민해본 사회학자 노명우의 책. 이 책은 사회학자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회학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존재 이유가 있다.” 저자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회학자의 눈으로 관찰하고, 현대의 풍경 이면에서 작용하는 시대의 욕망과 그의 역학을 서술한다. 머리말에서 “삶의 평범성이 학문적 보편성의 근원”이라고 했듯, 그의 전략은 학자이기 전에 한 사람 개인의 자격으로 상식, 명품, 프랜차이즈, 불안, 종교, 이웃, 수치, 취미 노동 등에 관한 평범한 풍속을 관찰하고 사회학자로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그 이면을 들여다보되, 또 그것을 평범한 언어로 서술하는 것이다. 거기에 그람시, 베버, 마르크스, 부르디외, 버틀러 등을 파고들며 깊이를 더하고 있다. 사유의 목적은 더 잘 살기 위해서다. 사회학자가 이야기하는 잘 사는 길은, 존재의 사회학적 자각에 있다. 저자는 ‘자살’을 다룬 챕터에서 사회학자 라이트 밀스를 인용한다. “한 개인의 삶과 한 사회의 역사는 그 두 가지를 함께 이해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역사적 변동과 제도적 모순으로 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누리는 안락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큰 흥망성쇠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이 관계가 자신의 미래와 장차 자신이 주체적으로 참여할지도 모를 역사 형성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일반적으로 모르고 있다.” 잘 산다는 것은 현대에서 종교의 위상을 갖게 된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로 인해 존재의 단절을 돌아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수많은 다른 개인, 사회, 역사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개인은 상식, 명품, 프랜차이즈, 종교 등의 풍속에 부유하는 플랑크톤에 불과하지만, 사회적 존재라는 명제를 자각하고, 그 안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개인은 비로소 진정한 ‘개인성’을 갖출 수 있다. 그런 개인은 미미해 보이던 삶을 스스로 운동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잘 살기 위한 실천의 동력이 되기 전에 큰 위안이 된다. 이것은 저자가 평범한 언어로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순서이기도 하다.
‘댓글 알바’라는 직업이 존재할 거라는 추측이 공공연해진 가운데 국정원 댓글 사건이 충격을 안기고, 도시 전설처럼 떠돌던 루머들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설마’가 사실이 되면 사람들은 의심이 많아진다. 나는 그 세계의 수요와 공급이 궁금했다. ‘댓글 알바’는 누가, 어떻게 시키고, 어떤 이들이 수주하며 ‘알바비’ 책정이나 성과 측정의 기준은 무엇일까. 취재력을 발휘해서 작가가 구축했을 『댓글부대』의 사실적 허구들은 이런 질문에 답을 제공한다. 그런데 그 세계의 생리를 좀 파악했다 싶을 때쯤, 주인공 팀 알렙의 행보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싶을 때쯤, 소설은 ‘댓글 알바’에 절대 기만당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독자의 확신을 무너뜨린다. 팀 알렙의 시작은 기업 상품평과 유학 후기 등을 지어내며 용돈 벌이를 하는 수준이지만, 비밀 조직 ‘합포회’와 이름 모를 ‘노인’의 지시를 받게 되며 이들은 대대적으로 여론을 몰아간다. 군중의 결집과 분열을 끌어내며 자신의 잠재력과 돈벌이의 가능성에 새로이 눈을 뜬다. 군중의 습성을 꿰뚫는 통찰력이 이들의 무기다. 이들이 이룩하는 궤멸적인 성과를 숨죽이며 따라가는 사이, 독자는 이쪽의 물정과 군중의 본성에 눈 뜬다. 이런 일들이 현실에서 또다시 벌어진대도 속수무책일 거라는 탄식, 그리고 어느 사회라도 필시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겠다는 비관에 휩싸이며. 좀 더 특정하게는, 이 재능 있는 젊은이의 자멸적인 선택이 작가가 관찰, 혹은 설정한 한국 사회라는 배경에서는 최선일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씁쓸한 자각과 함께 말이다.
취재와 동시대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의 특성대로, 이 책은 그가 수집한 사실과 거기에 쓰인 허구, 그리고 독자가 인지하는 현실 사이의 경계가 거미줄처럼 복잡하면서 미묘하게 존재한다. 소설 속, 기자가 댓글부대의 일원이었던 찻탓캇을 취재하는 장면에서 자꾸 장강명 작가가 겹친다. 이 소설은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인 어떤 것”을 다루고 있다. 요제프 괴벨스의 떠도는 어록이 각 챕터의 제목으로 쓰였는데, 그중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는 말은 이 소설이 시대의 물정을 내비치는 전략에 해당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