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는 경상대학교출판부 편집장을, 온라인상에서는 김천령이라는 필명의 여행 블로거로 잘 알려진 김종길의 『남도여행법』을 읽은 적 있다. 우리나라 기차 중 제일 느리다는 경전선을 타고 오래된 역 부근의 고장을 여행한 기록을 모은 책이다. 그는 이 여행이 “좀 더 느린 방식의 여행, 떠나기만 해도 치유가 되는 여행,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칠 수 있는 여행”이라 했다. 이 책에는 기차의 속도만큼이나 느릿해보이는 남도 구석구석의 진솔한 풍경과 문화·역사에 관한 글과 사진이 담겨있고, 여행 중 만나는 이들의 이야기와 표정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의 정원이 동양을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되었고, 특히 일본식 정원은 후기 인상주의 회화의 소재로 사랑받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정원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소수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따라서 한국 정원에 관한 책은 현저히 부족한 실정이며, 그나마도 대부분 전문 학술 서적인 탓에 대중이 읽을 만한 인문서는 거의 드물다. 김종길은 이러한 현실에 아쉬워하며 한국 정원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우리 정원에 대한 이해를 고취하기 위해 『한국 정원 기행』이라는 책을 세상에 선물했다.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점점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불현듯 소쇄원이 떠올랐다. 불을 스치는 바람, 서걱거리는 대숲 소리, 꽃이 피고 물이 흐르고 낙엽이 지고 하얀 눈이 내리는 풍경이 연신 떠올랐다. 가슴 깊숙한 곳에 우리 정원을 늘 품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책 표지에는 들창 밖으로 기이한 수형의 소나무가 서 있다. 들숨 한 모금 크게 마시면 허파 가득 청량한 솔향이 가득 채워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은 우리나라 곳곳의 정원을 관람하듯 구성되어 있다. 정원 조성 시기와 시대적 상황, 정원가의 철학등의 내용에 더해 그 후손들이 정원을 어떻게 유지하고 관리했는지까지 두루 살핀다. 또 각 정원의 특징에 맞는 감상법을 소
개하고 있어, 정원을 답사하는 이들에게 매우 유용한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국내 여행조차 떠나기 어려운 시국에 간접적으로 나마 우리 정원의 이모저모와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창덕궁에 들르곤 한다. 화사하고 따스한 봄볕 아래에서도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낙선재, 빗방울이 떨어질 때 더욱 빛을 발하는 부용정 연못, 늘 고요와 침잠 속에 잠들
어있는 후원은 빼놓지 않고 꼭 둘러보는 장소다. 몇 해 전에는 창덕궁 달빛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어둑한 저녁 무렵, 청사초롱을 들고 금천교의 돌다리를 건널 때는 마치 시간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 켜진 밤의 궁궐은 밝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그림자마저 찬란하게 아름다운 궁궐을 걷다 보면 후원의 정경이 꼭꼭 숨겨져 있던 보물처럼 불현듯 나타난다. 눈앞에 펼쳐진 산세를 바라보며 나는 마치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임을 실감하는 작은 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용지 내 인공섬과 정자 등 크고 작은 건축물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떻게 자연미와 인공미가 이토록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정원은 자연과의 조화를 넘어 자연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 자연을 더욱 자연스럽게 한다. 결국 어디가 자연인지 어디가 정원인지 경계조차 불분명하다. 최순우 선생은 창덕궁과 경복궁의 후원을 보면서 ‘동산이 담을 넘어 들어와 후원이 되고 후원이 담을 넘어 번져 나가면 산이 되고 만다’고 했다. ‘천지 만물과 어우러져 인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미완성의 천지를 완성하는 길’이라던 공자의 말도 있지 않은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자연이 눈과 마음에 담기는 창덕궁 후원을 보면 한국의 정원이 이토록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 정원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다듬어지고 계획되었다기보다 자연의 뜻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김종길이 “크게 완성된 것은 찌그러진 듯하며(大成若缺),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하며(大直若屈), 크게 정교한 것은 서투른 듯 보인다(大巧若拙)”고 한 노자의 말을 인용한 것은, 어딘가 미완성된 느낌을 주는 듯한 한국정원의 묘미를 잘 대변하는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자연이 눈과 마음에 담기는 창덕궁 후원을 보면 한국의 정원이 이토록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 정원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다듬어지고 계획되었다기보다 자연의 뜻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김종길이 “크게 완성된 것은 찌그러진 듯하며(大成若缺), 크게 곧은 것은 굽은 듯하며(大直若屈), 크게 정교한 것은 서투른 듯 보인다(大巧若拙)”고 한 노자의 말을 인용한 것은, 어딘가 미완성된 느낌을 주는 듯한 한국정원의 묘미를 잘 대변하는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숲을 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광풍각 건너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말로만 듣던 소쇄원 풍경을 곁눈질하기 위해서다. 그러곤 곧장 걸음을 옮겨 소쇄원 전체를 볼 수 있는 대봉대에서 다리쉼을 한다. 사람들은 애양단을 무심코 지나치는데, 나뭇가지에 가려진 작은 글씨에 관심을 두는 이는 별로 없다. 그 옆 오곡문도 마찬가지다. (…) 그보다는 대개 생경한 담장에 눈길을 주거나 외나무다리에 친근감을 표시하곤 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계곡에 발을 담근 특이한 담장과 그 옆으로 담장을 뚫어 놓은 트인 문에 집중된다. 그러다 보니 계속 건너 잘 가꾸어진 매대도 눈여겨볼 리 만무하고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소쇄처사(瀟灑處士) 양공지려(梁公之廬)’ 글씨 또한 매대 높직이 외롭기만하다. (…) 제월당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뒤뜰을 돌아 계곡을 건너가다 일각문 아래로 광풍각을 거쳐 소쇄원을 빠져 나간다. 이 모든 움직임에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소쇄원을 찾는 사람들의 대체적인 동선이다.”
오래전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는 궁궐, 사찰과 성지, 숲과 정원을 무척 좋아하셨다. 명절 연휴 때면 할아버지를 따라 하루 반나절 동안 이곳들을 방문하곤 했다. 김종길은 소쇄원을 일컬어 완벽한 공간 구성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별서라 했다. 소쇄원에는 “대숲은 자연 세속과 경계가 되어 말 그대로 맑고 깨끗하게, 즉 ‘소쇄(瀟灑)’하여 세속을 벗어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바람이 불면 대숲이 ‘소쇄 소쇄’ 하는 소리를 낸다는 유래도 있다. 그 소리를 들어보려고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고 한참을 멈춰 서 있던 기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