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건 사실 별게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의 연속 사이사이에 기쁨과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을 버무려 사유하고, 성찰하거나, 혹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다. 생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삶을 사랑했던 사람과 증오했던 사람, 시대를 잘 만나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못 만나 홀연히 잊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들 중 필적할 만한 삶을 남긴 사람은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기억에 살아남아 있다. 내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20여 년 전, 대한민국 문화예술 명인전 프로젝트를 위해 백남준, 박서보, 황병기, 이매방, 박정자, 정명훈이 내 카메라 앞에 섰다. 나는 그들의 삶 전부를 알 수는 없었지만 카메라 뷰파인더에는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대로 투영됐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기록해 나가면서 이들 존재가 지금의 시대와 우리에게 남긴 흔적을 명확히 보았다. 여기, 시대를 움직이고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또 한 사람을 기억한다. 얼마 전 우리를 떠나간 시대의 지성이라 일컬음 받는 사람, “선한 인간이 이긴다는 것, 믿으라”는 말을 남긴 이어령 선생님과의 6번에 걸친 만남을 돌아본다.
살아간다는 건 떡하니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일이다. 살아온 삶을 뒤로하고, 가족과 친구와 작별하고, 지위를 버리고, 모든 순간을 고스란히 느끼고 반응하던 육체가 사라질 채비를 하고, 생의 끝 직전까지 자신을 괴롭힐 고행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어령 선생님이 병환 중에 계시다는 소식과 함께, 항암 치료를 받지 않으시고 자택에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 누구나 품위 있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호상을 바라지만 모두가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세상을 떠날 수는 없는 법이다. 인생을 최대한 누리고 가겠노라 생각은 하지만 막상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한순간에 마음이 무너져 버린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티려고 애쓰기도 한다. 흔히 인생을 생로병사라 표현한다. 태어나 바로 늙기 시작하고, 병들고 죽는다는 뜻을 지닌 이 말은 우리 인생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인생의 반 이상이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혹독한 사실을 내포한다. 아프고 힘 빠지는 그 시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선생님의 결단이 존경스러웠다. 옛날 선비들은 큰 병에 걸리면 스스로 서서히 곡기를 줄여 나가며 죽음을 태연하게 맞이하려 했다. 이는 구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하기 싫은 한 인생의 존엄에 관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 시대를 밝히던 지성, 이어령 선생님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죽음에 항거하지 않고 기꺼이 떠나감, 나는 그것이야말로 고귀한 삶이자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이어령 선생님을 촬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에 지대한 공을 세운 선생님의 마지막 시간들,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마주하고 싶었다. 마침 한 신문사 문화부장이 이어령 선생님을 인터뷰 한다길래, 나는 “사진 촬영은 내가 하고 싶습니다”라고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님 측으로부터 전해 들은 대답은 “사진이 이미 많이 있으니, 있는 사진 중 몇 개를 사용하면 됩니다”였다. 이미 수없이 많은 카메라에 찍혀왔고, 이어령이라는 인물을 표현해주는 사진도 많고 많은 데다, 병환 중인 모습을 보고 싶어 할 사람이 어디 있으며, 아픈 모습으로 쓸데없이 모델이 되어주고 싶지 않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마침 나와 친분이 있는 김지수 기자가 그와 작업한 마지막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진행을 위해 주기적으로 댁에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와의 첫 촬영이 이루어졌다.
한 인물을 탐구하고자 초상을 촬영하면 보통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물건이나 행동이 함께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막걸리를 마시거나 담배를 입에 문 시인과 소설가의 사진… 그러한 방식도 좋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의 얼굴이 이미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생님을 둘러싼 배경을 모두 차단시켰다. 옆에서 김지수 기자가 “김용호 작가님, 사진 정말 잘 찍으세요”라며 이어령 선생님께 말했다. 테스트용 사진을 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야, 이건 잘 찍은 사진이 아니야. 여기에는 내가 있잖아. 내가 보여!” 실은 그동안 몰랐던 자기 자신을 내 사진을 통해 재발견했다는 뜻이었다.
사진작가에게 이보다 더 가슴을 뛰게 하는 찬사가 또 있을까? 나는 선생님께 당신의 모습을 계속 기록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은 흔쾌히 허락했지만, 나는 이내 주변의 싸늘한 반응을 인지할 수 있었다. 김지수 기자와의 작업도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이었던 터라 가족과 지인들은 선생님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편안하게 모셔 최대한 안정을 취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진작가에게 이보다 더 가슴을 뛰게 하는 찬사가 또 있을까? 나는 선생님께 당신의 모습을 계속 기록하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은 흔쾌히 허락했지만, 나는 이내 주변의 싸늘한 반응을 인지할 수 있었다. 김지수 기자와의 작업도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이었던 터라 가족과 지인들은 선생님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편안하게 모셔 최대한 안정을 취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와의 촬영은 여러 번의 자택 방문으로 이어졌다. 어떤 때는 선생님의 병환이 악화되기도 하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니 지치신 이유도 있고,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만남이 자주 취소가 된 탓에 방문 주기는 일정치 않았다. 항상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셨지만 그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야위어갔다. 병상 인터뷰 중에도 그는 언제나 이야기에 열정을 쏟았다. 한쪽 팔에는 링거 바늘을 꽂고, 물수건을 이마에 올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누워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모든 말은 현란한 손동작과 함께 튀어나왔다. 그가 표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전해졌다. 나중에 자신의 사진들을 가지고 무얼 할 것인지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당신이 살아있을 때 저작권이나 초상권 등의 문제를 정리해야 내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는 그 와중에도 사진작가로서의 내 입장까지 생각했다.
선생님은 내가 찍은 사진들이 무척 마음에 드신 것 같았다. 집에 사람들이 방문할 때마다 지금 촬영하고 있는 사진들이라며 보여주셨다고 한다. 내게는 아무 말씀 없었지만,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 갑자기 힘이 난다고 하셨다는 말을 그의 비서를 통해 전해 들었다. 당신이 돌아가신 후 이어령 아카이브를 만들게 되면 내가 찍은 사진들과 영상만을 가지고 하나의 방을 만들어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고도 하셨단다. 앞으로 어떤 사진을 찍고 싶냐 물으셨고, 나는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까지 기록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때 그는 살짝 역정을 냈다. 내 얼굴은 보시지도 않고, 동석한 다른 이의 얼굴을 보면서 “늙고 추하게 병든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하셨다. 순간 나는 위축됐다. 그리고 내 머릿속엔 감정과 이성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갈등과 고민이 시작됐다.
사진작가의 선택은 전쟁이나 기아, 난민과 같은 극한 상황 속에서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아프리카 내전에 궁지로 내몰린 사람들 속, 아사 직전의 한 아이와 그를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독수리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이가 독수리의 밥이 되었다는 루머까지 떠돌면서 사람들은 사진작가에게 왜 그 아이를 도와주지 않았냐고 비난했다. 그는 세인의 비난 때문인지, 스스로에게 가졌던 죄책감 때문인지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사진에서 ‘슈팅’은 사냥을 한다는 뜻과 같다. 피사체는 자연히 사진작가의 사냥감이 되는 것이다. 날카로운 선생님의 한마디에 나는 어느 순간 작가로서의 냉철한 이성과 한 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우정이라는 감정 사이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병환 중인 모습을 일부 촬영하게 해주셨다. 극도로 야윈 모습이지만 현란하고 재치 넘치는 이야기와 통찰이 그를 매우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는 북해 바다에 사는‘곤’이란 물고기가 등장한다. 곤이 몇만 년을 살면 ‘붕’이 되고, 붕이 날개를 펴면 천만리의 바다를 덮는다. 그리고 날갯짓을 한번 하면 멀리 날아갈 수 있다. 그와의 대화는 큰 바다를 헤엄치는 것 같았다. 청산유수처럼 흐르는 선생님의 이야기는 사방으로 뻗어갔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말들은 3차원의 입체적인 구조로 완성되어 내게 전해졌다. 동화부터, 철학, 고전부터 현대물, 거대한 것과 소소한 것,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살아 숨쉬는 듯 내 주변을 감쌌다. 그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선생님께 내가 제작했던 ‘모던보이’ 조명 작품을 하나 선물했다. 로봇을 연상시키는 사각형 도자기 몸 위에 커다랗고 밝은 전구의 머리를 가진 모던보이는 인간이 부품처럼 소모되고 기계화되는 현대사회 속에서 그 정신만은 환하게 불을 밝혀 스스로 빛났던 존재로, 20세기 초 선각자였던 모더니스트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선물을 받고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김지수 기자가 선생님댁에 마지막으로 방문을 했다. 김지수 기자는 내게 사진과 문자 메시지를 하나 전했다. 선생님 책상 위에 모던보이가 올려져 있다며, 그것을 바라보시며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저게 바로 나야.” 과연 그렇다. 그의 지성과 지혜는 진실로 이 시대를 환히 밝혀주었다.
이후 내가 촬영한 선생님 사진들이 김지수 기자에게 전해졌다. 온라인상에 이어령 선생님과의 인터뷰 기사가 올랐다. 이어령 선생님이 내게 전화를 주셨다. “늙고 추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해주어 고마워요.”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내게 책을 한 권 선물하시며 직접 메시지도 써 주셨다. 한 자, 한 자 떨리는 손으로 내 이름을 ‘용호’가 아닌 ‘영호’로 써 주셨지만 그것은 그의 모든 사력을 다했던 흔적이었다.
“3월이면 나는 여기 없을 거야”라던 선생님의 말씀은 꼭 들어맞았다. 그는 2022년의 3월을 누리지 못하고 떠나셨다. 영결식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진행되었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분을 잃는 것은 도서관 하나를 잃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선생님의 죽음은 수많은 도서관들이 사라진 것과도 같다. 지식과 철학의 사유공간으로 여겨지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선생님을 배웅했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더욱 깊다. 20세기 초기의 인텔리겐차 톨스토이는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여기에 있는가?” 라는 물음을 남겼다. 이어령 선생님과의 만남이 내게 남긴 화두이기도 하다. 그가 이 사회에, 삶들에, 젊은이에게 가진 마음은 단연 따뜻한 우정이었다. 삶과 사람에게서 길어올린 생각, 그 깊은 바다를 함께 사유하는 우정의 마음. 당신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며 차곡차곡 쌓인 내 우정의 마음 또한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느끼셨기를 바란다.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4월 중순부터 청담동 라이카 갤러리에서 전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