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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체가 된 서구의 연활자
글: 박지훈(디자이너, 타이포그라피 연구가)
도쿄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문자의 역사, 타이포그라피, 근대 미디어, 글꼴 연구를 진행.
에디터: 이윤성 / 사진: 세바스티안 슈티제 © Sebastian Schutyser, 신형덕
근대 활자의 유통과 서구에 의한 동양 활자 개발
동아시아 문자권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들어봤고 알고 있는 본문용 글꼴로 ‘명조체’가 있다. 명칭만으로 풀이하면 명나라의 글자 모양, 명판본에서 사용되던 한자의 표정을 뜻하나 오늘날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북한, 대만에 이르기까지 모든 한자 문화권에서 대표적인 본문용 글꼴로 통용되고 있다(지역에 따라 명칭을 다르게 쓰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중국을 출발점으로 동아시아 각 지역에 퍼져나간 글꼴 양식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근대 활판술의 바탕을 만든 명조체 활자란 중국인들의 제작물이 아니라 서구인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동아시아에서 사용되던 목판 인쇄 및 조선이 갖고 있던 활자 인쇄술은 19세기 전후 동아시아 사회의 근대화와 더불어 급격히 입지를 잃고 서구가 개발한 근대식 인쇄술주1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근대식 동양 문자 활자 개발의 주축이 된 인물들은 동양인이 아닌 서구인이었으며 그들의 한자 활자 개발은 동아시아의 식민지화 정책 및 선교 활동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바탕으로 실행되었다. 놀라운 점은 동아시아의 개화기에 100여 년 이상 크게 앞서 유럽의 각지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던 점이다. 한자의 경우 많은 문자 수가 활자화를 어렵게 했다고 언급하는 학자들의 말이 무색할 만큼, 그들은 ‘분합 활자(分合活字)’ 시스템주2을 고안하는 등 믿기 어려울 만큼 치밀하고 본격적으로 동양 문자의 활자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유럽에서의 한자 활자 개발은 프랑스를 시발점으로 한다. 프랑스는 일찍이 17세기 말부터 동아시아 진출을 목적으로 동양학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1715년부터는 루이 14세의 명으로 한자 활자의 개발이 시작되어 동양학 연구가인 에티엔 푸르몽(Étienne Fourmont)의 감수하에 1742년까지 제작이 진행, 1811년 들라퐁(Delafond)의 감수로 부족한 활자들이 보충되었다. 이때 제작된 40포인트 목활자를 시작점으로 장피에르 아벨레뮈자(Jean-Pierre Abel-Rémusat)의 『한문계몽(漢文啓蒙, Éléments de la grammaire chinoise)』(1822)에는 최초의 주조 활자인 24포인트 한자 활자가 사용되어 본격적인 인쇄 미디어의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왕립 인쇄소의 『왕실인쇄소 활자견본(Spéci-men typographique de l’imprimerie royale, Paris)』(1845)에는 40포인트 한자 목활자 및 아벨레뮈자의 24포인트 활자, 들라퐁의 18포인트 해서체 분합 활자(1830~34), 줄리앙(Stanislas Julian)의 16포인트 명조체 주조 활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프랑스의 동양 활자 개발에는 정치적 이유가 크게 관여하고 있었으며, 왕권에 의한 영향도 크게 작용하여 초기의 활자로는 비교적 높은 수준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