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십중팔구 맛이나 식감이 어떤지, 혹은 이것이 건강에 끼치는 효능이 무엇인지 논한다. 실제로 이것들은 각 음식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꼭 우리의 입 안으로 들어와서 쾌감과 효용을 안겨줘야만 비로소 음식이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 밖의 이야기들은 재미없거나 무의미한 걸까?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된 이달의 토픽에서는 음식을 기존의 통념과 다르게 보기를 시도했다. 우리 삶 곳곳에 과식을 유도하는 함정이 있음을 통찰하고, 전쟁사와 음식이 빚어낸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음식 종주국 논쟁을 재조명하며, 화제의 소설 『파친코』에서 민족 정체성과 인류애를 함축한 음식들에 주목해 소설 읽는 또다른 재미를 찾아본다. 맛, 식감, 건강을 완전히 배제하고 음식을 논하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깝지만, 우리의 관점을 환기해줄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이렇게 말한다. 먹기 외에 음식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들이 있다고. 무분별하게 먹고 마시느라 자꾸만 왜곡되어가는 음식과 우리의 관계를 한 번쯤 돌아보자고.
1-무엇이 우리를 먹게 하는가
솔직히 가끔은, 소위 말하는 ‘인싸’가 부럽다. 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기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대개 매력적이고 타인에게 호감을 준다는 뜻일 테고,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아 심심하거나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친구가 꽤 많았다. 교실 뒤편에 앉아 삼삼오오 공기놀이를 하고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나 잡기 놀이를 하는 동안 함께 뛰는 모두가 친구였다.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는 친구들 모두와 공평한 정도의 시간을 보낸다거나, 같은 관심사와 고민거리를 나누는 데 제약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지면서 그만큼 거리감이 생겨 관계가 소원해졌고, 그 사이에는 어김없이 균열이 생겼다. 그때보다 훨씬 많이 자란 지금, 나는 별로 인기가 없는 편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나 친한 친구들의 숫자로만 굳이 따진다면 그렇다. 하지만 내게도 여전히 소중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 많다.
먼저 우리가 무엇을 탐식하는지 생각해보자. 밤마다 삶은 고구마가 먹고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거나, 양배추를 너무 많이 먹어서 고민이라는 얘기는 접하기 힘들다. 떡볶이, 라면, 피자, 치킨, 햄버거, 초콜릿, 아이스크림, 케이크 등 우리가 도저히 참지 못하는 매혹적인 음식들을 모아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가공’된 맛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이 음식들에는 정제된 탄수화물과 당, 추출되고 합성된 맛과 향 등 가공된 재료가 사용된다. 환경 다큐 PD인 유진규는 저서 『맛의 배신』에서 미시간대학의 2017년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음식이 중독과 유사한 행동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가공 여부’를 꼽는다. 영양과 몸의 관계를 연구한 유타주립대학 행동생태학과 명예교수 프레드 프로벤자Fredirck D.Provenza 역시, 음식을 추출하고 정제하면 반응의 강도가 상승하고, 이것이 선호도의 강도를 상승시켜 그 음식을 자꾸 먹고 싶게 만든다고 강조한 바 있다.
여기에, 가공된 맛에 중독된 소비자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식품 산업의 전력투구가 더해진다. 『과식의 심리학』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 체계에는 당과 소금, 지방이 모여 최상의 쾌락적 보상을 제공하는 ‘지복점Bliss point’이 존재하는데, 오늘날 식품과학자들은 저항하기 힘든 맛과 촉감을 찾기 위해 당분과 지방을 함께 넣고, 그 함량을 인위적으로 높이는 식으로 보상을 극대화하는 데 몰두한다. 음식이 이렇게 두뇌의 보상 시스템을 과도하게 자극하면 중독이 심화된다. 배가 별로 고프지 않은데도 어떤 음식이 생각나고, 당장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맛에 중독되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오늘날 먹는 음식이 칼로리 대비 충분한 포만감과 영양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탓도 있다. 자연식품은 수많은 향미 화합물과 여러 종류의 당분, 지방산, 단백질, 미네랄 등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반면, 고도로 정제된 재료들은 성분이 지나치게 단순화 된다. 이런 재료로 구성된 음식은 포만감을 다층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해 많이 먹어도 허전함을 느끼게 하고, 과식을 유발한다. 영국의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역사가인 비 윌슨Bee Wilson이『식사에 대한 생각』에서 지적한 것처럼, 세계적으로 새롭게 주류가 되어가는 식단은 정제 설탕과 정제 탄수화물로 가득 차 있으며, 철분이나 비타민 같은 미량 영양소가 부족하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고 있음에도 영양은 부족하고, 이를 채우기 위해 더 먹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한다.윤리주의와 가부장제에 반감이 형성되고 전통적 성 역할에 거부감이 이는 일은 이처럼 관념이 사회 현실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2-제국과 지배의 역사가 담긴 한 접시
알면 알수록 무수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대상 중 하나가 바로 음식이다. 요리와 음식의 역사에는 당시의 사회·정치·경제적 체제와 구성원들의 문화·신념 등 다채로운 요소들이 깃들어있다. 음식 역사와 정치에 관한 연구로 저명한 레이첼 로던Rachel Laudan은 저서 『탐식의 시대』에서 인류 문명의 발전사를 이해하는 열쇠로 ‘요리와 음식’이 ‘총, 균, 쇠’보다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보다 나은 음식을 먹기 위한 끊임없는 탐구와, 이로 인해 탄생한 새로운 요리법은 제국의 탄생, 권력 이동, 종교의 확산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는 요리와 음식을 렌즈 삼아 여러 제국의 흥망성쇠, 주요 종교의 탄생과 확산, 민주주의 사회로의 이행 등 다양한 인류의 역사를 조망한다. 그에 따르면 요리와 음식이 가장 유용하게 활용된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제국과 권력이다. 지배층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배력을 확산하기 위해 요리 철학을 정립하고, 요리법과 음식을 전파했다.
“식민지 개척민, 외교관, 병사, 선교사, 상인을 비롯한 이주민과 여행자는 그들이 정착할 땅에, 그들이 운영할 대사관에, 그들이 세울 요새에, 그들이 설치할 포교 본부에, 그들이 거래 공간으로 이용할 장소에 그들의 요리를 함께 가져갔다. 도로를 지나거나, 바다를 건너거나, 어디로 가든 그들의 요리법과 요리 도구, 그리고 요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동식물들을 가져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요리는 확대되고, 제국들끼리 접촉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 번영을 이룬 제국의 요리는 정복자들에 의해 선택되었고, 제국의 경계 너머 멀리까지 받아들여지고 채택되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요리를, 몽골인들은 중국과 페르시아 요리의 대부분을, 로마인들은 그리스 요리를 받아들였으며, 20세기 초에는 일본인들이 영미 요리를 받아들였다.”
_레이첼 로던, 『탐식의 시대』 중
“트럭을 타고 가다 보면 사람들이 죽어 누워 있는 게 보였어. 짧게 깎은 머리가 파르스름한 게 꼭 햇빛에 드러난 감자싹 같았지. 그렇게 감자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었어… 도망치다 넘어진 모습, 그대로 갈아 엎은 들판에 죽어 누워 있었어… 꼭 감자처럼…”
_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중
제국이 지배력을 키우는 과정에는 언제나 전쟁이 있다. 우리는여러 기록과 증언을 통해 참전 군인들뿐만 아니라 같은 시공간에서 전쟁을 겪는 모두가 극도로 공포스럽고 끔찍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든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극악무도한 시간을 음식과 연관 짓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생각 이상으로 음식은 전쟁에 대한 많은 서사를 담고 있다. 살아있는 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판단할 수조차 없는 그 비극의 한중간에서도, 인간은 어김없이 배고픔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허기는 때로 인간성을 뒤흔들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강제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는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에서 수용자들은 마지막 숨을 거둔 이들의 옷을 벗겨 입고, 그들이 죽기 전까지 아껴두었던 빵을 먹으며 ‘타인의 죽음이 횡재’라 여기는 지경에 이른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밤이면 꿈을 꾸도록만드는, 우리 몸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만성적인 허기”로 인해“내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며 “빵, 그 성스럽고 거무스레한 조각”에 고파 인격과 존엄을 가차 없이 내버렸음을 고백한다.
3-음식으로 읽는 『파친코』
영문학, 미디어, 문화연구, 사회학을 전공한 문화사회학자. 런던대학교에서 (인)문학의 위기 담론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대, 서강대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 소설 속 다양한 음식을 통해 등장인물의 성격과 당대의 사회·문화적 상황 등을 현재 사회적 이슈와 맞대어 풀어내는 『맛, 그 지적 유혹』이 있다.
인간에게 음식은 섭취의 대상이기 전에 생각하는 대상이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의 말이다. 개인의 식욕은 그가 속한 사회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 즉 그 사회의 가치, 신념, 전통 등에 부합하는 것들에 한정된다는 의미다.인간은 생존을 위해 음식을 먹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이 욕구에 반응하고 대처하는 방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들이 속한 사회의 모든 요소와 상호작용하며 형성된다. 배고픔을 참는다거나 어떤 것을 먹을지 말지, 어떻게 요리할지를 정하는 등의 음식 소비 습관은 사회 계급, 문화, 국가, 역사, 젠더, 나이, 종교, 전통, 의례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잘 쓰인 소설에는 음식이 허투루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 속 음식은 글로 표현되지 않은 여러 요소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1932년 부산. 16살 선자가 유부남 생선 중매쟁이 고한수를 처음 만난 곳은 수산시장이다. 그의 집요한 눈길을 애써 모른 체하며 그녀가 바라본 것은 그녀 앞에 놓인 “원단처럼 접혀서 직사각형 모양으로 쌓여있는 마른미역”이다. 그녀 앞에 펼쳐질 구불구불하고 긴 인생 여정의 상징처럼. 고한수의 아이를 임신한 선자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배이삭과 함께 일본으로 가기로 한다. 이삭과 선자가 처음으로 함께할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은 부산 시내에 있는 작은 일식당이다. 둘은 서로에게 다짐한다. 이삭은 선자의 아이를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선자를 사랑하고 존중하겠노라고. 선자는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그리고 그 순간 그들 앞에 뜨끈한 국물의 우동이 도착한다. 오사카에서 새로이 펼쳐질 선자의 삶의 시작을 알리듯이.
최근 애플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에서 음식이 등장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음식은 삶의 중요한 순간을 규정하는 시적 상징이기도 하지만, 소설 곳곳에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다양한 의미 층을 만들어낸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를 아우르는 이 작품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관통하며 펼쳐지는 4대에 걸친 방대한 가족사에서 음식을 통해 인물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게 한다. 음식은 그들을 역사에 휩쓸리는 무리가 아닌 각각의 개인들로 보도록 이끈다. 일제의 식민 통치로 일그러지고 궁핍해진 삶의 외형 뒤에서 가족과 동족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고 일상을 회복하며 삶을 지속하는 모습이 음식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선자의 부모, 훈이와 양진이 훈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하숙집을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이유는 “경상도 최고의 요리사”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뛰어난 양진의 음식 솜씨 덕이다. 이삭이 양진의 하숙집을 찾아온 것도 오래전에 그곳에 묵었던 형에게 전해 들은 양진의 대구탕 때문이다. “위가 심장보다 기억을 더 잘하는” 법이니 말이다.
양진의 음식 솜씨는 변변치 않고 부족한 재료로도 하숙객들의 몸과 마음을 채우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데서 더욱 빛난다. 그녀는 곡식이 떨어지면 콩가루와 물만 섞어도 맛난 부침개를 만든다. 하숙하고 있는 어부들이 시장에서 팔지 못한 게와 고등어 등을 가져오면 절여두었다가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요긴하게 쓴다. 하숙객들의 상에 늘 뜨거운 찌개와 그릇 수북이 담긴 기장과 보리밥을 올릴 수 있는 이유다. 하숙비는 식비를 감당하기만도 빠듯하고, 겨울이면 연탄을 사기 위해 식비를 줄여야 할 형편이지만, 연탄장수가 배달을 오면 뜨거운 보리차와 찐 고구마를 대접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먹을 것이 늘 부족한 시절이었으나, 그래서 음식은 더욱 사람들 간의 관계를 이어주고 서로의 삶을 이어가게 도와주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궁핍한 삶, 변변치 않은 음식일지언정 『파친코』에서 음식은 그 남루함 속에서도 풍요롭고 빛날 수 있는 인간애를 드러낸다.
음식은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어가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삭과 선자가 혼인 신고를 한 날 그들은 일제의 수탈로 구경조차 하기 힘든 쌀밥을 먹는다. 양진이 쌀가게에 가서 애원 끝에 간신히 구해온 쌀이다. 신랑과 신부만 먹일 양이면 된다고 사정해도 팔 쌀이 없다던 쌀가게 조씨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밥하고 남으면 떡이라도 좀 하고 싶다는 양진의 말이다. “떡이요?” 여자들이 흰쌀로 떡을 한다는 소리를 들은 지가 언제인지, 그는 아득한 기억을 더듬으며 꿍쳐둔 쌀을 내어준다. 특별한 날이면 이웃끼리 떡을 해 나누어 먹던 기억이 그에게 강한 공동체 의식을 일깨워준 것이리라. 그가 쌀을 내어준 데에는 곧 민족 공동체의 전통을 이어가는 데 동참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삭과 선자의 일본 생활에서 음식은 더욱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삭과 선자는 오사카에 있는 형 요셉과 그의 아내 경희와 함께 지내게 된다. 선자는 도착하자마자 부엌으로 가 경희와 함께 저녁 준비를 하고, 경희는 쌀밥으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환대를 표한다. 음식을 통해 선자와 경희는 가족의 결속을 맺는다. 또한 한국인에게는 제대로 된 취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본에서 그들은 김치를 만들어 팔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자식들을 돌본다. 음식은 생계뿐 아니라 정체성을 이어가는 수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