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April, 2016
동화보다 쉽고 만화보다 스펙타클한 소설들
Editor. 신사랑
요즘 들어 지인들과 재미있게 읽은 책을 이야기할 때, 또는 동료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 받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한 가지 있다. 한국 사람들은 생각보다 책을 무언가를 배우고 성찰하기 위해 읽는구나(나는 소년기부터 20대 중반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생활했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지 이렇게 한 나라의 국민성을 보편화해 판단하는 건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개인적인 경험에서는 그랬다. 워낙 어릴 때부터 동화, 추리소설, 판타지 등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한국의 치열한 입시경쟁을 겪을 필요가 없었던 나로서는 재미 추구식 독서를 청소년기에도 불태울 수 있었고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자연스레 이어졌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우리나라사람들은 영화도 참 좋아하고, 만화에도 열광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흥과 재미를책에서는 잘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책을 접할 때 감성이 풍부해지는 에세이라든지 마음에 위로가 되는 팝 사이콜로지(pop-psychology, 대중심리학)적 자기계발서, 아니면 소위 문학성 높다는 ‘깊이있는’ 소설을 생각하는 것 같다. 세상에는 꼭 진중한 느낌의 책들만이 있는 게 아니라완전하게 가볍고 흥미진진한 재미를 주는책들도 많은데 말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선 장르물 소설 판매가 상당히 저조하다고한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책을 유흥으로 생각하고 즐기고, 더욱 많은 장르 소설이 한국어로 출판되기를 바라며 정말 ‘재미있는’ 책세 권을 추천한다.
“여기서 일하고 싶다면 엄격하게 따라야 할 조건이 세 가지가 있네.
첫째,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자리를 비우지 말 것. 둘째, 서가에 꽂힌 책들을 절대 펼치지 말 것.
셋째, 손님의 외모, 심리 상태, 책을 요청하고 받아가는 방식 등을 정확하게 기록할 것.” —본문 중
전 세계 테크 중심지이며 실리콘밸리가 근접해 있는 샌프란시스코. 그 도시 속에 곰팡내 가득한 오래된 책방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막 일을 시작한 주인공은 웹 디자이너 출신 실업 청년 클레이다. 쌓여가는 월세와 생활비 조달을 위해 별생각 없이 취직해버린 페넘브라 씨의 24시간 책방은 그 생김새만큼이나 운영 방침 또한 뭔지 모르게 비밀스럽고 기이하다. 클레이는 매일같이 커져가는 호기심에 절대로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열어보지 말라는 규율을 깨트리고 만다. 그리고 이것을 눈치챈 페넘브라 씨는 자취를 감추고 책방은 개점 이래 처음으로 문을 닫는다. 결국 클레이는 서가의 책들 속에는 숨겨진 암호가 들어 있고 이것을 풀기 위해 500년이라는 세월을 노력해온 ‘부러지지 않은 책등’이라는 비밀단체가 전 세계의 도시에서 페넘브라 씨의 서점과 같은 책방들을 운영하며 조금씩 일원을 늘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페넘브라의 24시 서점』은 교묘하게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읽는 이에게 공감하기 쉬운 판타지를 펼쳐 보인다. 실제로 구글에서 진행 중인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를 줄거리 라인에 사용하고, 현존했던 르네상스 시대 베니스의 인쇄업자 알두스 마누티우스를 등장시키고, 킨들 첫 번째 에디션 모델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 구시대적이어서 오히려 ‘힙하다’는 등의 유머러스한 표현들을 곳곳에 가득 채워놓았다. 저자인 로빈 슬로언은 실제로 트위터에서 일하던 당시 이 책을 구상했고 그래서인지 디지털 세계와 아날로그의 세상을 매끄럽게 접목한 현실적이면서도 스펙터클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풀어놓았다. E-book 형태의 자가출판에서 시작했지만, 독자들의 성원으로 2012년에 정식 출판된 이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당당히 오르게 된 이 책을 이제 우리도 만나보자.
전통 깊고 장엄한 용들의 가문 중 하나인 하트스라이커 집안의 막내 줄리어스는 수십 명의 극악무도하고 무자비한 가족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가지 방침을 고수한다. 그것은 바로, 조용히 숨죽여 다른 용들의 안중 밖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수동적이고 나약한 줄리어스의 성향을 스트라이커 가문의 리더이자 현존하는 모든 스트라이커 종족의 어머니인 베테스다는 절대로 허용할 수가 없다. 유순한 용이라는 건 존재할 수도, 존재할 가치도 없다고 믿는 베테스다의 방침에 따라 줄리어스는 인간의 몸 형태 안에 갇혀버린 채로 인간들의 도시로 쫓겨난다.
베테스다는 줄리어스에게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스트라이커 가문의 명성에 어울리는 잔인하고 야망 가득한 용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평생을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선포한다. 하지만 한없이 약하고 왜소한 줄리어스가 오래된 지구의 마법이 되살아난 후 거대하고 신비스러운 마법 정령의 통치하에 놓인 ‘옛 디토로이트’에서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술, 유령, 전설 속의 괴물들이 가득한 도시 판타지인 이 책은 저자 레이첼 애런의 하트스트라이커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다. 『Nice dragons finish last』는 단순한 도시 판타지가 아닌 종말 후 디스토피아적 느낌 가득한 액션 판타지이기도 하고, 유머 가득한 유쾌 모던 마법 소설이며, 무엇보다 개성 강하고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만화보다 더 만화 같고 영화처럼 화려한 재미를 책으로도 느껴보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하트스트라이커 시리즈에 입문해보자. 사악하지만 숨 막히는 미모를 자랑하는 용 세 자매, 상업화된 마법사회, 영혼을 빨아먹은 유령 고양이까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작은 친구들의 행성』은 H. 빔 파이퍼가 쓴 1962년 휴고상 후보작 『작은 보송이Little Fuzzy』의 줄거리와 사건들을 존 스칼지가 다시 계발해서 쓴 소설이다. 때는 바야흐로 우주개척의 시대, 주인공인 잭 할로웨이는 언제나 자기 잇속만 차리고 혼자인 걸 좋아하는 외톨이 늑대 같은 인물이다. 그는 계약직 측량업자로 거대한 우주 기업인 자라투스라를 위해 행성 23에서 일하는 도중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 미네랄 자원 태양석을 대량으로 발견한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기업 자라투스라를 상대로 할로웨이 역시 온갖 잔머리를 굴려 거대한 돈을 벌 수 있는 계약관계를 협상해낸다. 이렇게 일확천금의 기회가 눈앞에 굴러들어온 것을 자축하며 작업에 열중하는 도중 임시로 살고 있는 거처에 고양이랑 비슷하게 생긴 새로운 생물체가 나타난다. 얼핏 보기에는 고양이 같지만, 두 발로 서서 걸으며, 비디오에 포착된 그들의 행동에서 할로웨이는 이들이 꽤 높은 지능을 가진 생물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너무나도 귀엽고 친근하게 생긴 그들의 모습과 영리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에 매료되어 할로웨이는 이 생명체를 친구로 맞아들인다. 하지만 할로웨이의 전 여자 친구이자 외계생물학자인 이자벨은 이 보슬보슬한 생명체들이 단순히 머리 좋은 애완동물이 아니라 ‘사람’과 동등한 지능과 인격을 갖춘 지성체임을 감지한다.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진 생물체가 사는 행성은 우주 개발법상 엄격히 개발 및 채굴이 통제되기 때문에 할로웨이는 자신의 이득과 이 생명체들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도덕적 갈등에 빠진다. 머나먼 미래의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의 현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기업 자본의 횡포를 주제로 담고 있는 이 이야기는 빠른 진행과 시원스러운 문장체로 인간의 탐욕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나간다. 공상과학 소설의 거장인 존 스칼지 특유의 재기발랄함과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가득한 이 책은 완벽하고 철두철미하게 ‘즐거운’ 경험을 읽는 이에게 선물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