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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19

‘덤’이 얹는 행복

Editor. 김유영

페이지를 넘길 때 온몸이 따뜻해지는 책을 좋아합니다.
누구를 만나긴 귀찮은데, 위로가 필요한 날 읽기 좋은 책을 소개할게요.

『수플레』
애슬리 페커 지음
박하

디저트는 우리의 지루한 삶에 소소한 기쁨을 얹어준다. 삼시 세끼 밥만 먹고 살아도 지장 없지만, 그럼에도 디저트를 먹는 건 인생에 ‘덤’으로 행복을 얹으려는 행위이지 않을까? (실제로 ‘dessert’는 프랑스어로 어떤 일의 마무리 혹은 덤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 인생에 뭐 그렇게 재밌고 특별한 일이 많이 일어날까? 잔잔하게 지나가는 일상이 대부분이고 힘들거나 괴로운 일은 더 많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웃고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디저트를 먹는다. 디저트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잠시나마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치유의 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애슬리 페커가 쓴 터키소설 『수플레』는 인생에서 상실과 좌절을 마주한 세 명의 주인공이 요리를 통해 삶을 치유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기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세 주인공은 인생에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이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채 절망에 빠진 이들은 ‘부엌’이란 공간에서 요리하고 ‘수플레’란 레시피에 도전하며 공허했던 삶을 채워 나간다.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며 홀로 남은 프랑스 남자 마크. 그는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요리를 시작한다. TV 프로그램을 따라 하며 엉성하게 파스타를 만들고, 요리책이나 각종 재료 및 도구를 준비하면서 하루 일과를 채운다. 매일 조금씩 느는 솜씨에 뿌듯해하던 마크는 우연히 요리책에서 ‘수플레’를 발견하며 새로운 메뉴에 도전하기로 한다. 나머지 두 주인공은 현실적이고 뼈 아픈 사연을 지녔다. 남편을 따라 이민 온 필리핀 출신 미국인 릴리아. 그녀는 갑자기 신체 일부가 마비된 남편을 힘껏 보살피지만 꾸중만 듣고, 설상가상으로 우연히 발견한 유언장에서 남편이 자신에게 재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른 주인공 페르다는 가족들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는 데서 기쁨을 얻는 터키 여성이다. 그녀는 거동이 불편해진 엄마의 병시중을 드는데, 성격이 까다로운 친모 때문에 점점 육체적, 정신적 피로에 찌든다. 두 여성은 자신들의 고단함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부엌에 들어가서 수플레를 만든다.
물론 모든 사람이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런 재능을 타고난 사람만이 마법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음식’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다. 지구의 중심은 거대한 쇠공이 아니라 모든 집의 부엌이다.
릴리아와 페르다는 중년 여성으로서 애환을 갖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둘은 세상 밖으로 나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돈 버는 길 대신 집 안에 남아 사랑하는 이에게 따뜻한 음식을 내주는 길을 택했다. 주체적인 선택이기보다는 시대가 떠넘긴 역할이었다. 하지만 보살핌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애정이나 존경이 아닌 경멸과 외면을 받았다. 거동이 불편해진 남편이나 친모를 최선을 다해 돌보지만 둘을 존중해주는 이는 없다. 이 여성들에게 ‘부엌’이란 자신들만의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일터이자 단조로운 삶을 버티게 해주는 쉼터이다. 부엌은 집에 갇힌 여성들이 재능을 발휘하고 마법을 부리며 세계의 중심이 되는 곳이라고 책은 재해석한다.
수플레의 한가운데가 푹 꺼질 때마다 매번 가슴이 텅 비는 것 같은 공허함을 느끼겠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가슴이 텅 비는 것 같은 공허함을 느끼면서도 계속 살고 있는 것처럼.
수플레는 성공하기 어렵기로 악명 높은 메뉴다. 세 주인공은 몇 번이고 수플레를 만들고 실패하는 일을 반복한다. 오븐에서 꺼낸 반죽 한가운데가 폭삭 꺼지면 영혼이라도 주저앉는 기분이지만, 그들은 다시 수플레를 만든다. 수플레가 봉긋 서는 날엔 뛸 듯이 기뻐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며 하루하루 살아갈 위안을 얻는다. 수플레를 맛있게 만든다고 그들의 인생이 구원받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부엌에 있는 동안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수플레를 맛보며 인생에 작은 행복을 ‘덤’으로 얹는다. 우리 인생에서 역시 가운데가 봉긋 선 아름다운 수플레를 마주할 일은 드물 것이다. 그렇지만 세 주인공이 계속 수플레를 만드는 것처럼, 슬픔이 오면 다시 소소한 기쁨으로 일상을 채울 수 있다. 지쳐버린 하루 끝에 덤덤한 위로가 필요하다면 수플레 한 스푼을 건네는 이 책을 읽길 권한다. 그러고 주인공들을 따라 부엌으로 달려가보자. 일상을 버티게 해줄 나만의 레시피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