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는 『광대한 여행』에서 “꽃잎 하나의 무게가 세상의 표면을 변화시켰고, 세상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면서 지구상에서 꽃이 해온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꽃을 피우는 식물들이 벌, 나비, 새 등과 접촉한 덕분에 우리가 사는 생태계에 이토록 다양한 종이 존재할 수 있었으며, 꽃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비단 그뿐일까? 꽃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이름이 되어주고, 사랑과 감사, 슬픔과 애도를 대신 전하며, 수시로 환한 얼굴을 드러내어 울적한 일상에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불어넣는다. 이달의 토픽에서는 잠깐 예쁘게 피었다 이내 지고 마는, 사랑스럽지만 연약한 존재로만 알았던 꽃의 다채로운 면모를 나눈다. 그 깊고 촘촘한 우주를 경험하고 나면, 장식이나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꽃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1-우리가 몰랐던 꽃의 일, 초록의 일
꽃의 사전적 정의는 ‘종자식물의 번식 기관’이다. 꽃이 핀다는 것은 대를 잇고 종을 유지하려는 식물의 의지와도 같다. 이윽고 열매를 맺어 마침내 종자를 퍼뜨리고야 말겠다는 욕구를 식물은 꽃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한 개화와 결실의 시간을 통과한 후에야 씨앗이 여문다는 건 너도나도 아는 너무 당연한 이야
기다.
하지만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나 기회가 모두에게 쉽게 찾아오는 것 같지는 않다. 나조차도 그랬으니까. 꽃이 활짝 피었다고 달뜨다가도 꽃이 지고 나면 그만이었다. 씨앗은 그냥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는 줄 알았다. 돈만 내면 각종 씨앗을 상점에서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식물분류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씨앗이 되기 전 단계를 일컫는 용어는 ‘밑씨’다. 씨앗으로 온전히 영글기 전에 밑씨는 절대 식물체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가만히 웅크린 채 씨방(자방) 안에 들어있다. 난자가 사람 몸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밑씨를 씨방이 온전히 호위하고 그 씨방을 꽃받침이 꽁꽁 싸고 그 둘레에 꽃잎이 달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것은 밑씨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일종의 집합체다. 난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궁이 있고, 자궁 주변을 장기가 둘러싸며, 뼈와 지방과 피부 조직 등이 겹겹이 둘러막는 우리 인간의 신체 일부와 너무나 닮았다.
밑씨에서 이어진 암술대는 식물체 바깥으로 빼꼼 튀어나와 꽃 안쪽에 있는 암술머리가 된다. 그 둘레에 수술이 있으면 양성화다. 단성화는 암꽃과 수꽃이 한 식물체에서 따로 존재한다. 아예 서로 다른 개체에 암꽃과 수꽃이 각각 달리는 암수딴 그루(암수딴포기)도 있다. 종류는 달라도 목적은 매한가지다. 거룩한 잉태를 성사하는 것. 꽃가루를 발산하고 갖은 수를 써서 암술대 주변으로 꽃가루를 끌어모으는 건 그래서 꽃의 본분인 셈이다. 제 속을 활짝 열어젖히거나, 각종 향기를 피워 곤충을 부른다거나, 제 몸을 사람의 손이나 바람에 온전히 맡기는 방법으로 말이다.
식물은 자신의 암술머리를 축축하게 만들거나 끈적하게 하는 데 공을 들이는 편이다. 대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닿는 일명 ‘수분’ 또는 ‘꽃가루받이’를 위해서다. 암술머리에 도착한 꽃가루는 암술대를 타고 밑씨까지 내려간다. 어딘가로 이끌려 헤엄치는 정자처럼 난핵에 가닿아 수정란을 만드는 것이다.
씨앗을 보면 언젠가부터 나는 자꾸만 꽃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식물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침으로 먹겠다고 식탁 위에 아몬드 한 줌을 올려놓고는 이런 식이다. “서아시아 일대가 원산지? 기원전부터 사람들은 너를 재배했지? 지중해 인접 국가에서 시작해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현재 최대 주산지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살구나무랑 혈통이 가까운 장미과 식물이잖아, 그치? 그러고 보니 꽃이 살구나무랑 정말 닮았어. 그 어여쁜 모습에 반해 고흐도 명작 ‘아몬드나무’를 탄생시켰겠지?”
꽃이 닮았다는 건 결국 열매도 씨앗도 비슷한 모양이라는 뜻이다. 살구처럼 생긴 아몬드나무 열매 하나를 따서 과육을 벗기면 나무껍질처럼 딱딱한 안쪽 껍질이 나온다.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의 역할을 하는 내과피다. 그걸 쪼개면 나오는 진짜 씨앗이 우리가 먹는 한 알의 아몬드다.
커피를 내리려고 원두를 보면서도 나는 커피나무의 ‘꽃 시절’을 떠올린다. 에티오피아가 원산이고 예가체프 계열의 품종인 이 꼭두서니과의 커피라는 식물이 아프리카에서 나무로 자라 하얀 꽃을 피웠던 때를. 꽃이 지고 빨간 열매가 탐스럽게 맺었을 때의 영롱한 모습을. 그러다 보면 과육을 제거하는 공정 과정과 과육이 벗겨진 채 생두의 몸으로 한국에 입국해서 누군가의 손에 타닥타닥 볶인 후 곱게 갈려 커피로 추출되기까지 이뤄지는 한 식물의 여정 또한 줄줄이 그려보게 된다.
2-아름답기만 할까? 꽃의 두 얼굴
5월에 가장 분주한 꽃을 꼽으라면 아마 카네이션이 아닐까? 부모님,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을 표하기 위해 우리는 망설임 없이 카네이션을 선물한다. 그러나 빨간 카네이션이 지금과 같은 지위에 오른 데에는 미국 꽃 산업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크게 작용했다. 또한 같은 카네이션이 러시아와 포르투갈에서는 혁명을 의미하며, 오스카 와일드를 계기로 동성애의 상징으로 여겨진 이력도 있다. 이처럼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알던 꽃에는 복잡다단한 의미와 역사, 문화가 얽혀있다. 이러한 꽃의 다양한 얼굴을 다룬 책 『세계사를 바꾼 16가지 꽃 이야기』와 함께, 알고 보면 때론 어둡고 모순적이기까지 한 꽃의 두 얼굴을 살펴보자.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 빠져 죽은 뒤 꽃으로 피어난 아름다운 청년 나르시스에서 이름을 따온 수선화Narcissus는 이른 봄에 피어 계절의 변화를 알리고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징조로 사랑받아 왔다. 특히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여동생과 함께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바람에 너울거리는 한무리의 황금빛 수선화를 보고 지은 시 「수선화」는 이 꽃에 전세계적인 유명세를 선사했다.
그러나 계절의 변화도, 수선화의 아름다움도 목격한 적 없는 채로 초등학교 시절에 강제로 「수선화」를 암송해야 했던 카리브해 지역 출신 작가들에게 이 시는 강압적인 식민지 문화의 잔재일 뿐이다. 이러한 갈등이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 중 하나는 카리브계 여성 문학의 대표 작가인 저메이카 킨케이드Jamaica Kincaid의 소설 『루시』다. 햇볕이 작렬하고 가뭄이 잦던 카리브해 섬을 떠나 미국에서 입주 보모로 일하게 된 19살 루시는 제법 친밀한 관계였던 고용주가 마치 선물이라는 듯이 수선화를 보여주자, 그게 무슨 꽃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 꽃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 루시가 “아줌마는 내가 열아홉이 될 때까지 실제로 보지도 못할 꽃을 노래한 긴 시를 열살의 나이에 암기해야 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해요?”라고 반발하는 장면에서, 꽃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설렘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는 우리 세계의 비극과 모순을 마주하게 된다.
이 자전적인 소설을 세상에 내보인 킨케이드는, 훗날 에세이「수선화와의 춤(Dances with daffodils)」에서 이 꽃과 화해했음을 밝힌다. 자신이 거주하던 미국 버몬트 지역에 수선화 구근 1만 개를 심은 것이다. 그러나 워즈워스가 시 속에서 “구름처럼 지향 없이 거닐다” 수선화를 발견하는 것과 달리 킨케이드는 ‘수선화의 긴 줄기에 발이 묶여 뜰로 나가지 못하는’ 장면으로 글을 맺는다는 점에서, 수선화에 대한 두 사람의 감상에는 여전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3-지금, 우리 꽃들이 피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사진기자를 해오면서 숱하게 들꽃 사진을 찍었지만, 그 어떤 꽃도 도통 가슴에 맺히지 않았고,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아마도 꽃의 생김만 보고 아름답게 찍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알고 지내던 조영학 작가가 우리 꽃이야기와 함께 사진을 담아 책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해 함께 산과 들을 누빈 덕분에 비로소 꽃의 삶을 들여다보게 됐다. 꽃이 피는 데는 다 이유가 있고, 꽃 피는 때엔 생존 전략과 의미가 있었다. 꽃을 보며 삶을 배웠다. 그것들을 이해하고 꽃을 보니, 비로소 그들의 생김보다 의미가 카메라에 맺혔다. 언제, 어디서, 어느 이름으로 피는 지가 알알이 맺힌 사진들은 이야기가 되어 내 가슴에도 맺혔다. 그리하여 이제는 꽃의 삶을 다른 이들과 자주 공유하려 한다. 지금 계절, 우리 곁에서 흔하게, 혹은 운이 아주 좋아야 마주할 수 있는 낯익고 새로운 얼굴들을 나눈다. 보는 이의 가슴에도 꽃의 삶이 아울러 맺히기를 바라며.
5월이면 샛노란 꽃이 예서제서 하늘거린다. 빌딩 숲에서도, 담벼락에도, 길거리에서도 노랑, 노랑한다. 도시 삶에 바쁜 우리는 그저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하도 고운 유혹에 못 이겨 가끔 휴대폰으로 사진을 남기기도 한다. 너나없이 휴대폰 카메라를 갖고 있는 이른바 ‘사진 인류’의 시대,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언제, 무엇이든 찍을 수 있는 우리에게 길거리 꽃만한 모델도 없을 터다. 그렇게 예쁘게 나온 사진을 누군가에게 자랑해 본다. 그런데 여기서 눈치 없는 누군가가 묻는다. “꽃 이름이 뭐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찍었을 뿐이니 대답하기에 난감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저 ‘풀꽃’이라 해도 통한다. 풀에서 핀 꽃이 맞으니까 말이다. 그 여러 풀 중 도심에서 가장 흔하게 꽃을 피우는 삼총사의 이름은 알아 둬도 좋을 것이다. 이들은 오래전 보릿고개엔 나물이기도 했던 귀한 삼총사였다. 잠시 짬 난다면 이들 꽃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자. 참으로 곱다. 이리 고우니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며 나태주 시인이 「풀꽃」이란 시를 지었을 터다. 5월이면 길에서 우리를 스치며 노란 빛깔의 손을 흔드는 그들의 이름은 ‘씀바귀’ ‘뽀리뱅이’
‘고들빼기’이다.
살면서 만난 가장 슬픈 운명의 꽃을 꼽으라면 단연 매화마름이다. 꽃 이름에 ‘매화’가 앞서면 ‘매화만큼 아름답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꽃은 매화만큼 빼어나고, 잎은 붕어마름을 닮았다고 해서 매화마름이라 이름 지어진 친구다. 그런데 이 고운 친구들의 운명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인박명’이다. 우리 꽃 전문가인 조영학 작가가 들려주는 매화마름의 운명을 듣고 보면 왜 ‘미인박명’인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얘들은 논에서만 삽니다. 그런데 꽃이 피고 질 때쯤, 논갈이하지 않으면 종족 번식을 할 수가 없어요. 만약 논갈이하지 않으면 씨가 물 위에 둥둥 뜹니다. 씨가 워낙 약해서 높은 온도에 그냥 녹아버려요. 반드시 경작해야만 땅에 스며들어 이듬해 꽃 피울 수 있어요.”
매화마름은 워낙 경쟁력이 약해서 다른 잡초를 피해 논에 터를 잡는다. 그 이후 땅속에 스며들어야만 씨를 살려낼 수 있다. 제 몸을 희생해야만 씨를 살릴 수 있다니 어찌 이리도 기구한 운명일까! 게다가 이 꽃은 논이 점점 개발되면서 멸종위기에 처한 지 오래다. 지금은 안면도, 강화도에만 남아있는 형국. 다행히도 멸종위기에 처한 매화마름을 보존하는 군락지가 강화도에 있다. 이 논은 시민들의 성금으로 마련한 것이다. 결국 꽃을 망치는 것도 사람이고, 꽃을 지켜내는 것도 사람인 게다. 슬픈 운명을 가진 매화마름, 그들을 볼 수 있는 시기는 바로 5월, 모심기 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