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하교 시간에 버스나 지하철에 오르면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중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무리가 있었다. ‘가랑잎 굴러가는 것만 봐
도 까르르 웃음이 나는 나이’라는 말이 그 친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오로지 손과 표정만으로, 조용하고 유쾌하게.
볼륨을 높여요
“청각장애는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나에게는 조금 독특한 언어, 수어가 있으니까요. 나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우리는 잘 모르는 상황이나 낯선 상태를 두고 자신에게 익숙하거나 유리한 방향으로 판단하기 쉽다. 신체적으로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사람을 병약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대표적인예다. 『수화로 시끌벅적 유쾌하게』의 주인공들은 모두 청각장애인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 듣지 못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표정과 몸짓으로 얼마든지 생각과 감정을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청각장애가 있어도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당연하고도 새삼스러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수화로 시끌벅적 유쾌하게』를 쓴 라사 잔쵸스카이테Rasa Jančiauskaitė는 폴란드 소수민족인 리투아니아인으로,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폴
란드의 드비에 쇼스뜨레Dwie Siostry 출판사에서 주관하는 어린이 동화책 국제공모전 2016 클레어보이언트Clairevoyant에서 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자못 심각하고 어렵게 받아들여질 수 있
는 청각장애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뛰어난 예술성까지 인정받은 것이다. 오랫동안 리투아니아 청각장애인 청소년협회와 인연을 맺어온 작가는 협회에 속한 여섯 아이들의 이야기를 간결한 글과 그림으로 펼쳐 보인다. 아이들 각각은 청각장애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짧지만 분명하게 전한다. 제한된 색상을 사용한 따스한 일러스트레이션과 군더더기 없는 텍스트의 조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장애를 바라보는 생각과 태도에 무한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소리를 만드는 손짓
근래 TV 속 수어통역사의 활약이 더 크게, 더 자주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에는 권동호 수어통역사가 출연한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두고 좋은 마음으로 봉사한다며 칭찬하는 사람과, 한 화면에서 시선이 분산되니 자막으로 대체하라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힘주어 전했다. 청각장애인에게 한국어는 외국어와 같고, 이에 따라 수어통역은 장애인을 위한 봉사도 부가서비스도 아닌, 필수적인 언어 지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아요.우리는 하나를 선택하기만 하면 돼요.”
청각장애인은 수어를 사용한다. 수어는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처럼 누구라도 배우고 활용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수많은 언어 중 하나다. 해외를 방문할 때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그 나라의 언어를 익히듯, 우리가 모두 수어를 배운다면 어떨까? 나와 너를 구분 짓는 경계를 넘어, 보다 원활한 교류와 자유로운 대화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꿈꿔본다. 그렇게 된다면, 라사 잔쵸스카이테의 말처럼 청각장애는 더 이상 장애로 불리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