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년 사이에 내추럴 와인 열풍이 절정을 향해가고 있다. 그런데 사실 내추럴 와인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와인 마스터이자 내추럴 와인 애호가인 이자벨 르쥬롱Isabelle Legeron의 말대로, 내추럴 와인은 ‘본래의 와인’이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농사지은 포도를 자연 친화적으로 발효시킨, 수천 년 전부터 만들던 방식 그대로의 와인. 유기농, 또는 생명 역동 농법으로 농사짓고, 와인 양조 중 포도 껍질에 있는 자연효모 외에 첨가물을 넣거나 특정 성분을 제거하지 않고, 이산화황은 아예 사용하지 않거나 병입 시 보존 용도로만 극소량 사용해 발효한 와인을 내추럴 와인이라고 한다. 내추럴 와인숍 ‘내추럴보이’를 운영하는 와인 전문가, 정구현이 쓴 『내추럴 와인; 취향의 발견』을 통해 내추럴 와인의 매력에 빠져보자.
생명 역동성을 담아 기른 포도
내추럴 와인을 이야기함에 있어 가장 흔하게 듣는 단어 ‘비오다이나미 농법’, 즉 생명 역동 농법이란 ‘생명 역동성’을 농사에 담는 방식을 일컫는다. 독일어로는 비오다이나미, 프랑스어로는 비오디나믹, 영어로는 바이오다이내믹이라고 말한다. 1920년대 오스트리아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가 최초로 제안한 이 농법은 농사의 모든 과정이 자연의 주기 변화와 질서를 따르는 것을 전제로 한다. 생명 역동 농법으로 일구는 포도밭에는 화학물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천연 허브와 미네랄 조제품을 사용해 광합성에 필요한 빛과 열을 최대화한다. 심지어 포도의 수확 및 와인의 병입 시기까지도 빛과 열의 강도와 행성의 위치 등에 따라 정해진 시기에만 이루어진다.
자연환경과 포도의 공생
내추럴 와인이 생산되려면 건강한 효모가 포도나무와 오랫동안 함께 자라야 한다. 자연효모는 땅속에서 겨울을 난 뒤, 봄과 여름에는 지표면의 풀들과 포도나무 가지에서 생장한다. 그리고 가을에 포도가 익기 시작하면 포도껍질 표면을 하얗게 뒤덮는다. 자연효모를 활용해 포도를 재배할 때는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풀들이 과도하게 자라면 양이나 염소들이 포도나무 사이에서 풀을 뜯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맺힌 포도의 대략 10% 이상은 야생 새와 동물들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노지에서의 올바른 포도 농사는 좋은 와인 생산을 넘어 자연 생태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내추럴 와인의 떼루아
좋은 내추럴 와인용 포도가 저지대의 평지에서 생산되는 경우는 드물다. 저지대는 비가 내리면 물이 내려와 포도의 생산성은 높아지지만 향과 맛, 당도와 산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생산량을 극도로 제한해 품질을 높이는 내추럴 와인용 포도는 대부분 언덕이나 고도가 높은 경사진 지역에서 재배된다. 저지대로 비를 흘려보내는 고지대는 대체로 건조하고 척박해, 포도가 생장하기 쉽지 않다. 이런 환경에 포도나무를 밀집해 심으면 물과 영양을 차지하기 위해 나무들이 서로 경쟁하며 뿌리를 깊게 뻗어 나간다. 이처럼 내추럴 와인은 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와인, 즉 ‘떼루아’의 와인이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와인
내추럴 와인을 입에 머금을 때 간혹 김치의 군내나 장마철 습기먹은 화장실 같은 쿰쿰한 냄새로 불쾌감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를 ‘마우스Mouse’를 일으킨다고 표현한다. 바람직하지 않은 젖산균의 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자극적인 냄새를 표현한 와인 테이스팅 용어로, 냄새가 강해지면 실험용 쥐를 키우는 케이지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흥미롭게도, 이 마우스는 조금만 섬세하게 일어나면 내추럴 와인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이 된다. 마우스를 일으키는 성분 중 하나인 ACTPY는 갓 구운 빵의 바삭한 크러스트에서 느껴지는 고소한향을 내는 물질이며, 또 다른 성분 ACPY는 생쌀 향기나 갓 지은 밥 냄새와 비슷한 향을 낸다. 그러나 이 향이 와인에 많이 남게 되면 고소한 향이 과일향과 꽃향기들을 가로막고 먹먹한 느낌을 내기도 한다. 또 다른 성분인 ETPY는 팝콘이나 옥수수 향을 내는데, 입안에 그 성분이 많이 머무르면 산도가 낮아져 휘발되지 않음으로써 쥐 오줌 같은 냄새가 느껴진다.
펑키한 와인
많은 사람들이 내추럴 와인은 대량생산된 일반 와인과는 매우 다른, 이해하기 힘든 맛과 향이 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프랑스 보르도의 내추럴 와인 명가인 샤토 멜레Chateau Meylet나 와인을 주제로 한 만화 『신의 물방울』에도 등장한 샤토 르 퓌Chateau Le Puy 같은 곳의 와인은 누가 마셔도 인정하는 톱클래스의 와인이다. 일반 와인과 마찬가지로, 내추럴 와인도 유명한 산지들을 알고 즐긴다면 맛에 있어 실패할 일이 없다. 와인의 가장 큰 매력은 산지와 포도 종에 따른 다양성이라 할 수 있을 텐데, 내추럴 와인은 그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그러니 내추럴 와인이 가진 자연 그대로의 맛을 이상한 맛으로 치부하기보다는 그것을 내추럴 와인만의 ‘펑키함funkyness’으로 바라보고 이해해보는 것은 어떨까? 파격적이고 멋지다는 뜻의 ‘펑키함’은 기존 와인에 대한 기준에서 보면 결점이 될지 몰라도, 그맛의 기저에 있는 생명력을 생각해보면 내추럴 와인의 매력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산화황은 잘못이 없다
이산화황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와인 오크통을 소독할 때 사용된 역사 깊은 살균제다. 내추럴 와인은 이산화황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거나 사용 자체를 줄이고 있긴 하지만, 와인병입 과정에서 극소량으로 사용되는 이산화황은 굉장히 안전한 물질이다. 말린 나물이나 과일에는 와인보다 훨씬 많은 양이 사용되기도 하니 말이다. 많은 내추럴 와인 애호가들은 이산화황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 와인병을 볼 때 그 함유량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한다. 하지만 생산 과정에서 이산화황을 첨가하지 않은 내추럴 와인에도, 효모가 발효될 때 자연 발생하는 극소량의 이산화황이 검출된다. 한국에는 표기가 안 된 성분이 추후 검출되면 해당 와인을 전량을 폐기하거나 반송하는 법이 있어서, 한국으로 들여올 때는 ‘이산화황을 넣지 않았다’는 내용을 스티커나 펜으로 지워야 한다. 그러니 내추럴 와인병에 ‘이산화황 함유’라고 표시되더라도 놀라거나 질색할 필요는 없다.
내추럴 와인과 잘 어울리는 발효음식
한국의 젊은 셰프들 중에는 내추럴 와인을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의 장류를 사용하거나 식초와 채소를 듬뿍 사용한 섬세한 요리에 내추럴 와인만큼 어울리는 술을 찾기가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같은 이유로 간장과 식초, 향이 강한 요리용 술과 발효 소스를 많이 활용하는 홍콩의 파인 다이닝에서도 내추럴 와인의 인기가 좋다. 또한 노르딕 퀴진의 큰 획을 그은 레스토랑 노마 NOMA는 와인 리스트 전체를 내추럴 와인으로 꾸리고 있다. 북유럽식 요리를 과학적으로 섬세하게 다듬는 이들은 발효를 요리의 근본으로 믿는다. 젖은 나무판 위에서 연기와 함께 익힌 요리를 비롯해, 야생 허브와 버섯 등을 활용해 자연의 향을 듬뿍 머금은 그들의 요리에는 역시 자연효모의 뉘앙스를 그대로 담은 내추럴 와인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뚝심이 보인다.
오래된 힙함
내추럴 와인 운동은 각국의 사라져가는 토착 포도 품종들을 보호하고, 다양한 양조 방법과 문화를 보존한다는 점에서 슬로푸드 운동과도 결이 맞닿아 있다. 내추럴 와인은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사장된 양조기법들을 첨단 과학의 힘을 빌려 부활시켰다. 내추럴 와인 양조자들 중 상당수는 생물학이나 화학을 배운 첨단 양조기법의 장인들이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사라져간 기법을 다시 활용할 때도 여러 부분을 고려하여 발전시키고,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양조기술들을 개발했다. 이처럼 동시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최첨단의 과학을 동원하면서, 가장 오래된 방식을 고수하는 내추럴 와인이 ‘힙한’ 와인으로 여겨지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