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June, 2018
남자친구와 같이 읽을 책이 없냐고요?
Editor. 이희조
‘그때 그 책을 읽었더라면’ 하고 느낄 때 있으시죠? 뒤돌아 후회하지 말고 미리 읽어두면 어때요?
이럴 때는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이라면 에디토리얼에 적힌 제 계정으로 메시지 주세요. 메일을 통해 상담해드립니다.
흔히 가족이나 친한 친구와 대화할 때 삼가야 할 주제로 정치와 종교를 들곤 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페미니즘 또한 화제로 꺼냈다가 서로의 의견 차이를 확인하고 속상한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꼭 이성 관계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과 페미니즘에 관해 얘기할 때 다음과 같은 일이 흔히 벌어진다. 여성은 자신이 직접 겪었던 것이든, 주변 사람에게 들은 얘기든, 아니면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얘기든,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끌어와 여성의 ‘피해자성’을 피력한다. 그러면서 상대방 반응을 조심스레 살핀다. 상대방이 어디까지 자신의 얘기에 공감하고 있나 살피면서 어느 수준까지 피해자성을 격화해야 하는지 가늠한다. 피해자의 위치를 취하지 않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최상의 상대임이 파악되면 그제야 마음 놓고 진짜 ‘내’가 된다. 이제 나는 적극적으로 생각을 이야기하고 무언가에 분노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 전까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쯤 되면 정녕 페미니즘은 그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끼리만 얘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까지 페미니즘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소리친 결과라고 생각하니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상대방과 이야기 나누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럴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역시 책이다. 나보다 훨씬 많이 고민하고 생각한 사람들이 정리해놓은 책을 같이 읽으면 좀 낫겠지, 하며 시중에 나와 있는 수많은 페미니즘 입문서며 소설에 눈을 돌려본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책을 찾기 어렵다는 것. 내가 읽기에는 좋아도 남에게 권하기는 무언가 부족하고, 주제의식이 너무 명확히 드러나는 책은 내가 가르치려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같이 읽자고 제안하기 망설여진다. 웬만하면 나도 한 뼘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책을 찾기란 더욱 어렵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명작 한 편 추천한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이다. 주인공 부부는 1960년대 런던을 감쌌던 일탈과 퇴폐의 분위기와는 멀찍이 떨어진, 아이를 많게는 여덟 명까지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일생의 소원인 인물들이다. 둘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곧 결혼해 네 명의 아이를 차례차례 낳는다. 그렇게 원하던 꿈의 가정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가던 도중, ‘다섯째 아이’ 벤의 등장은 그들의 행복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도깨비, 괴물 등 다양하게 묘사되는 벤은 백일도 되지 않아서 제힘으로 침대를 잡고 일어서는가 하면, 형을 협박하고 옆집 개를 죽이는 등 야만적인 본능을 발산한다. 벤이 가족의 불행을 가져왔다고 믿는 남편 데이비드는 벤은 자기 애가 아니라며 책임을 방기하고 아내 해리엇은 벤을 지켜야 한다는 모성애적 본능과 숨길 수 없는 공포, 혐오, 죄책감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다 자기 분열의 지경에 이른다.
재밌는 점은 저자는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를 원망하고 정신병동에 감금까지 한 부부에게 비난의 화살을 들이대지도 않고 아이로 인해 망가져 버린 엄마의 삶을 대뜸 동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계속 섣불리 판단하려는 독자들을 멈춰 세운다. 벤은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처럼) 어느 때는 정말 악마 같다가도 어느 때는 조금 삐뚤어졌을 뿐 크게 문제없는 정상아다. 옆집 개를 죽인 것처럼 나오지만 정확한 사인은 결국 미궁이다. 그 미로 속에서 헤매다 정신을 차린 순간, 나도 몰랐던 내 안의 편견이 어느새 시험대 위에 올라와 있다.
어딘가 굉장히 불편한데 어디가 불편한지는 모르겠고 분명 같은 배에 탄 것 같은 사람끼리도 다른 감상을 얘기하는 서로를 발견한다. (훌륭한) 소설이 가지는 힘이다. 여러분은 어디가 불편했나? 한번 주변 사람들과 나눠보시길. 줄타기가 아닌 즐거운 토론의 장이 될 터이니.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