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October, 2019
나의 첫 책
Editor. 김선주
주말이면 한가로이 만화방으로 향한다.
사람들이 제각기 짝지어 다니는 거리를 샌들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안경까지 장착하고 걷고 있노라면 자유롭기 짝이 없다.
나는 그냥 책이 좋다. 종이책도 좋고, 전자책도 좋고, 오디오북도 좋다. 언제나 책을 탐냈고 서점에만 가면 지갑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내가 왜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져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주변 사람들에게 우스갯소리로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건 다 우리 가족 때문이야.” 그렇다. 이건 다 엄마, 아빠 때문이다. 거기에 언니도 한몫한다. 초등학교 때 엄마는 녹색 어머니 활동 대신 학교 도서관 사서 일을 자처했고, 그 덕에 나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고학년이 읽는 소설의 문장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읽곤 했다. 토요일에는 언니와 도서관에 가 매점에서 도시락과 즉석라면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일요일에는 책 구경을 핑계로 아빠 손을 끌고 서점에 가 책을 보다가 돈가스를 먹고 집으로 돌아오면 완벽한 주말이었다. 특히 아빠는 서점에 가면 사고 싶은 책을 고르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그때마다 핑계를 대곤 했는데, 유일하게 읽고 싶어서 사달라고 내민 책이 힉스 부부가 쓴 『사라』였다.
힉스 부부는 1986년부터 ‘끌어당김의 법칙’을 바탕으로 워크숍을 열어 건강, 풍요, 인간관계 등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 주요 문제들에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해왔다. 실제로 『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도 이들의 워크숍에 참가해 그 정보를 바탕으로 책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철학 소설의 대표작인 『소피의 세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흐름을 가지고 있다. 『소피의 세계』는 14살 소피가 의문의 편지를 받으며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라면, 『사라』는 호기심 많은 10살 소녀 사라가 올빼미 솔로몬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의 사슬, 솔로몬의 사슬 등 ‘끌어당김의 법칙’을 언급하고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안에는 죽음과 행복 같은 철학적 생각도 담겨있는데, ‘철학책’보다는 철학적 사고를 통해 도출한 삶의 방식을 알려주는 책에 가깝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혈안이 된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 묵묵히 이 책을 읽었다. 1권을 다 읽고 나서는 2권과 3권을 한 번에 구매해 새벽이 오는 줄도 모르고 읽다가 엄마에게 들켜 호되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15년 만에 먼지 쌓인 책을 꺼내 천천히 살펴봤다. 노랗게 빛이 바랜 책을 한 장씩 넘기며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을 꼽아 삽화로 재현하고 내용을 발췌해 그림책을 넘겨보는 것 같은 재미를 주기도 하고, 챕터를 각각 짧게 나눠 이야기의 진행 속도를 높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읽기에는 무척 어려운 책이지만 잘 마련된 구성 덕분에 충분히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좋았던 내용이나 기억하고 싶은 문장에는 어디서 본 것 있어서 밑줄을 그어가며 읽은 흔적이 남아있다.
“네 기분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야. 다시 말해 넌 고통의 사슬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물은 끌림의 법칙을 따르고 있어.”
“사라, 잘 들어. 난 죽지 않아. 죽음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어. 단지 이 몸을 쓰지 않을 뿐이야.”
추측건대 아마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탈출구를 찾았던 것 같다. 어쩌면 관계에 대한 고민을 했을지도. 내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파악할 만큼 생각이 성숙하기 전에 이 책을 만났고, 나름대로 관계를 완화하기 위해 써먹어 보려고도 했다. 좋은 결과랄 게 있겠느냐마는 소소한 위안으로 삼았겠지. 지금에 와서야 이
책을 왜 읽었는지 유추하며 어린 애가 읽기에는 조금 위험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상이나 정확한 철학 이론을 찾기도 어렵고, 정말로 ‘끌어당김의 법칙’을 따르면 삶이 행복하게만 변할 것 같은 꿈을 심어주는 건 아닐지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