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책이 선택한 책
October, 2020
나무와 책에 관한 허무맹랑한 이야기
Editor.윤성근
여느 가게들의 사정이 다 비슷하겠지만 책방에도 때때로 무례한 손님들이 찾아온다. 이건 책방에 앉아 온종일 손님을 맞아보지 않은 사람이면 잘 모르는 사실이다. 흔히들 책방엔 책을 좋아하는 손님들이 많이 오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이다.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을 빌리자면, 좋은 손님은 대부분 비슷한 이유로 좋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 종류가 가지각색이다.몇 해 전 가을 이맘때 겪었던 희한한 손님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시작은 스마트폰 카메라 때문이었다.
조용한 책방에서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가 계속 들렸다. 소리의 원인은 구석 자리에서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 손님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책방에 있던 손님은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책을 한 권도 못 팔아서 기분이 안 좋은데 저 사람은 무얼 하는 걸까?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책을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모든 페이지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판매하고 있는 책이라 그렇게 사진으로 다 찍어가시면 안 돼요.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오히려 뭐가 잘못됐느냐며 되물었다. 급기야 스마트폰을 내려놓더니 자기만의 철학에 대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자연주의자라고 했다. 책은 나무를 훼손해서 만드는 것이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파괴적인 물건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출판되는 종이책 산업을 금지해야만 아마존이 다시 울창해지고 지구온난화도 멈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물론 책은 좋은 것이니까 아예 없애기보다 모두 전자책으로만 출판하면 문제 될 것 없다는 나름의 해결책까지 내놓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자신은 종이책을 절대로 사지 않고 전자책만 보는데, 오늘 헌책방에 와서 책 사진을 찍는 이유는 이 책이 오래된 절판본이라 전자책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만 루슈디가 쓴 풍자 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소설엔 라시드라는 멋진 이야기꾼이 나오는데 이웃인 시청 서기 생굽타 씨는 라시드가 하는 이야기를 몹시 싫어한다. “그 이야기들은 도대체 다 뭡니까? 인생은 이야기책도 아니고 농담거리도 아니에요. 재미난 이야기는 결국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사실도 아닌 이야기가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전자책 마니아도 비슷한 말을 했다. 종이책은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으로 책장을 넘겨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책의 핵심은 글자이고 그것을 읽으면 그만이다. 손으로 만지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소설 속에서 어린 하룬은 아버지를 향해 퍼붓는 “사실도 아닌 이야기가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라는 공격에 적절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무서워할 뿐이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라시드의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뜻밖의 상황이 펼쳐지지만.
결국 나는 그 손님을 거의 쫓아내다시피 해서 내보낸 다음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나 역시 책을 쓰는 사람이 아니던가? 이제껏 열한 권이나 썼고 그중에서 몇 권은 증쇄까지 했으니 그로 인해 사라진 나무는 얼마나 될까? 과연 내가 쓴 책은 나무의 쓸모만큼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다. 책의 가치는 오래 지난 후에나 알게 될 테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았던 라시드의 이야기가 처형을 당할 뻔한 루슈디를 살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무처럼 줄기를 뻗는 이야기들은 책 밖으로 나와 많은 사람을 살게 하는 희망의 숲이 된다. 그러니까 나무와 책은 결국 같은 일을 하는 거라고 믿는다.
나는 전자책 마니아가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검색창에‘나무’를 검색한 뒤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들을 보며 마치 산림욕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우스운 장면을 상상해본다. 나무 사진도 쓸모가 있겠지만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진짜 나무의 쓸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책의 쓸모는 읽는 일에만 있지 않다. 그건 책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그 손님이 책방에 다시 온다면 이번엔 내가 실컷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책과 나무의 쓸모에 대해 라시드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