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il of Tales 동화 꼬리잡기

나만의 녹는점을 찾아서

글. 황유진
자료제공. 오늘책

여름방학 기념으로 아이들과 함께 ‘슬라임 카페’에 처음 가보았다. 기본 재료인 물풀, 액티, 리뉴에 더불어 수십 가지의 색소 향료, 파츠까지. 그동안 선물 받은 한 가지 슬라임으로만 놀던 아이들의 눈이 한껏 똥그래졌다. 조물조물 말캉말캉 쫄깃쫄깃 척척! 일부 슬라임에서 검출된 붕산 성분이 아이들의 건강을 해칠까봐 그동안 사주지 않았던 게 머쓱할 만큼 슬라임 만들기의 매력에 빠진 모습이었다. 요즘은 손에 흙 묻히며 놀 기회가 적으니 이런 걸 주무르는 게 재밌는 걸까, 빤히 쳐다보는 내게 아이들은 “아무 생각이 안나서 좋아.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느낌이야”라며 신난 마음을 연신 전했다.
이상하고 신기한 카페
『슬라임 카페에 입장하시겠습니까?』는 2018년 웅진주니어 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한 서지연 작가의 신작으로, ‘슬라임’이라는 작은 놀잇감이 ‘지구 평화’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실현한다는 흥미로운 발상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외계 생명체의 지구 침입을 막을 인공 지능 로봇 개발에 번번이 실패한 우주위원국은 최후의 방법으로 막강한 힘을 지닌 인간의 화와 분노에 주목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연스럽고 솔직한 감정들이 살아 숨 쉬는 어린이, 특히 높은 교육열로 인해 365일 스트레스에 찌들어 있는 ‘잠수동 에듀 타운’의 어린이들을 타깃으로 삼는다. 그러나 부모가 짜 놓은 빡빡한 시간표를 소화하느라 바쁜 아이들을 만나기란 영 쉽지 않다. 고심 끝에 우주위원국은 잠수동에 세계 최초의 ‘마음 치유 슬라임 카페’를 연다.
미움뒤범벅죽, 쯧쯧혓바닥, 메롱메롱투명그림, 짜증범벅짜장면 같이 특이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슬라임으로 가득한 카페는 곧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는다. 그런데 로봇이 운영하는 이곳 슬라임 카페에는 은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아이들이 슬라임을 주무르는 사이, 파츠 속에 숨겨진 감정 데이터베이스 칩이 그 아이의 체온, 맥박, 목소리 등을 감지해 화, 분노, 수치심 등의 감정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수집한 감정 데이터를 인공 지능 로봇에 장착하려는 우주위원국의 속셈은 꿈에도 모른 채, 잠수동 어린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다양한 이름의 베이스와 파츠를 골라가며 저마다의 슬라임을 완성해간다.
어린이를 구하라!
잠수동 슬라임 카페의 1호 손님은 우주다. 건축 설계도면 그리는 일을 하는 우주의 엄마는 아들 또한 자신의 설계도 안에서 촘촘하게 효율적으로 움직이기를 바란다. 우주는 겉으로는 고분고분 엄마를 따르는 아이였다. 쉴 틈 없이 학교-집-학원을 오가며 지친 일상을 이어가던 우주는, 로봇의 손에 이끌려 엉겁결에 슬라임 카페에 입장한다. 숙제는 했는지, 학원은 제때 갔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엄마의 문자 메시지를 뒤로 한 채, 우주는 답답하고 화나는 마음을 손끝에 담아 슬라임을 힘껏 주무른다.
가슴속에 억눌린 감정을 품고 사는 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영상 채널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억지로 좋은 척, 재미있는 척, 맛있는 척을 해야 하는 미지는 뭐든 원하는 만큼 해본 적이 없다. ‘미지의 세계’ 채널 구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엄마가 직접 미지의 리액션과 해야 할 일을 정해주기 때문이다. 천우는 원하는 게임을 다 사주는 아빠가 있어 친구들의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엄마와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들어와 거칠게 구는 아빠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우주를 비롯한 잠수동 아이들은 슬라임을 주무르면서 자신도 미처 몰랐던 날 선 마음과 불편한 감정을 헤아리고, 꽁꽁 숨겨두었던 속내를 하나 둘 꺼내 놓는다. 그 어마어마한 감정들은 메아리처럼 아이들 주위를 떠돌고, 자신의 마음과 정면으로 마주한 아이들은 힘든 감정 속에서도 되레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된다.
과학 시간에 배운 물질의 상태처럼 마음도 오랫동안 어루만져 주면 변하는 걸까? 누군가 함께 울어주는 게 이렇게 큰 위로가 된다는 걸 우주는 오늘 처음 알았다. 왜 화가 났는지, 왜 답답했는지 슬라임에게 털어놓고 나니 목구멍에 딱딱하게 박혀 있던 응어리가 조금씩 녹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 버린 슬라임 때문에 꽉 막혀버린 잠수 초등학교 화장실 하수관이 결국 터지고 만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슬라임 홍수에 직접 뛰어든 부모들은 그제서야 슬라임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상처 난 마음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꼭꼭 숨겨두었던 분노, 서로를 향한 애증 등 온갖 감정이 해일처럼 덮쳐온다.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모른 채 살아온 어른들도 슬라임 속에서 저마다의 해묵은 슬픔과 서러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아이들은 “아이답게” 놀이를 시작한다. 거대한 슬라임은 미끄럼틀이 되고 트램펄린이 되고 나팔과 모자가 된다. 모두가 한바탕 울고 웃으며 신나게 놀고 난 뒤에야 온 학교를 잡아먹을 듯 기세 등등하던 슬라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진짜 마음 사용법
요즘 어린이들은 너무 바쁘다. 학교생활은 물론이거니와 방학이라고 여유롭게 쉴 수도 없다. 학원에, 과외 줌 수업에, 쉴 틈 없이 시간표대로 굴러가는 하루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지운다. 하지만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건 단순히 공부만은 아닐 테다. 아이의 말과 행동 뒤에 가려진 진짜 감정을 읽고 경청하지 않는 어른들의 태도야말로 어린이를 힘들게 한다.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 몰라주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몰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외롭고 답답한 기분을 돌보아주지 않기… 말해봐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체념에 휩싸인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살필 여력이 없다. 힘든 감정이 한데 뭉치고 헝클어지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실마리조차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감정에는 색깔도 모양도 없다.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거친말과 행동으로 표현되기도 쉽다. 내가 지금 느끼는 지치고 힘든 감정에 어떤 감정들이 중첩되어 있는지,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알아보고 해소하기 위한 각자만의 방법이 꼭 필요한 이유다. 우주는 슬라임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알게 되고, 미지는 영상에 찍히는 대신 직접 사진을 찍으며즐거움을 회복한다. 남들이 구겨버린 나의 감정을 다시 반듯하게 펼치고,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시간. 자신만의 안전한 시공간에서 쏟아내는 생각이나 감정은 어느새 단단한 마음 근육으로 자리잡아 스스로를 돌보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자기만의 녹는점을 찾는 방법 하나쯤 알고 있으면 어떨까요. 기분을 달래줄 음식, 신나는 노래, 실컷 수다 떨 친구 (…) 여러분도 내 마음을 함부로 빼앗기지 않게 귀하게 보듬고 살펴 주세요. 그게 나를 구하고, 친구를 구하고, 또 지구를 구하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자고요. _「작가의 말」 중
감정을 돌보는 일이 나를 구하고 나아가 친구와 지구를 구하는 일이라는 작가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감정이 어떤 모양인지 알게 된 우주는, 겉으로는 센 척하면서 실은 애정과 관심에 목마른 천우의 속마음도 어루만져줄 줄 알게 된다. 천우에게 슬쩍 슬라임을 건네며 너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된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똑바로 관찰하고 알아차릴 줄 아는 어린이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좀 더 다정하고 보드라워질 것이다. 충분히 슬퍼본 이는 타인의 슬픔 앞에서 같이 울어줄 수 있고, 충분히 행복해본 이는 타인의 기쁨 앞에서 같이 웃어줄 수 있는 법이니 말이다.
September22_TailofTales_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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