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핑크빛 노을이 내려앉은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한다. 어떻게든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뚫어져라 하늘을 바라본다. 사진을 찍어 보지만, 눈앞에 펼쳐진 황홀함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한다. 그 순간 느끼는 벅찬 감정, 피부에 와닿는 바람, 코끝을 스미는 청량한 공기까지 다 담기지 않아서일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순간은 생각처럼 쉬이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누구나 한 번쯤, 아니 그 이상으로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기억 속에 각인되기를 바란다. ‘순간’을 ‘영원’한 형태로 남기려면 어떤 기록 매체가 요긴할까? 때론 잘 찍은 한 장의 사진보다 세밀한 감정으로 가득 채운 그림 한 점이 가슴속 깊이 침투하기도 한다.
『순간 수집가』 속 그림들은 부드럽고 선한 기억의 입자들만 모아 놓은 듯한 세상을 보여준다. 어딘가 꿈결 같은 그림들이 이국적이고도 다른 시간의 한 켠을 경험하는 듯한 감각을 건드린다. 섬에 사는 한 소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순간들을 따라가다보면, 마치 어느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 당도해 그곳의 온화하고 느린 시간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 함께 있는 것 같다. 초현실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묘사의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모든 페이지의 순간을 수집하고 싶은 유혹이 인다.
“햇살이 빚어 낸 가느다란 그림자가 내 뒤에서 마루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는 동안, 시간은 막스 아저씨의 그림 속에서 끝없이 확대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 그림들은 아저씨가 여행을 하면서 보았던 것들에 대한 추억이고 회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모든 그림 속에는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날 꽉 휘어잡고는 그림 속으로 잡아끌었습니다. 나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막스 아저씨는 언제나 특정한 순간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나는 그런 순간이 있기 전에 이미 어떤일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걸 분명히 느꼈습니다. 그 순간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계속될 하나의 이야기가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섬의 항구 근처에 위치한 건물 5층에 화가 막스 아저씨가 이사온다. 아저씨는 세 층 아래 사는 소년인 ‘나’와 금방 친구가 된다. 아이들은 구닥다리 철테안경을 쓴 뚱뚱한 소년을 놀리기 일쑤였지만 막스 아저씨는 소년을 ‘예술가 선생님’이라 부르며 소년의 바이올린 연주를 기쁘게 들어주었다. 틈만 나면 5층으로 올라가 시간을 보내는 소년과 작업실에서 그림에 몰두하는 아저씨, 창 밖에 들리는 제비갈매기들의 우짖는 소리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으로 초대하는 듯 하다.
“어떤 그림이든 비밀이 있어야하지. 나조차 그게 뭔지 모를 수 있어. 그리고 사람들이 내 그림에서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발견할 수도 있단다. 나는 수집가일 뿐이야. 난 순간을 수집한단다.”
막스 아저씨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긴 여행을 떠나며 소년에게 우편물을 받아주고 화분에 물 주기를 부탁하며 열쇠를 맡기는데, 아저씨가 없는 화실에 들어선 소년은 막스 아저씨가 자신만을 위해 마련해 준 특별한 전시를 경험한다. 그림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얼마든지 다른 장소로 여행을 떠날 수 있고, 언제든 푹신한 소파와 째깍거리는 벽시계가 있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소년은 막스 아저씨의 그림들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그 너머에 자신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함박눈이 내리면 하얀색 덩어리처럼 저만치 멀리 나타나는 눈코끼리들과 하늘을 나는 서커스단 자동차 등 막스 아저씨가 느낀 환상적인 순간들은 고스란히 그림으로 남아 소년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살아 움직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 또한 막스 아저씨가 구축한 낯선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저마다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각자에게 주어진 수많은 시간만큼이나 수집하고 싶은 순간들도 무수히 많다. 그 모두를 우리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추억을 벗 삼아 살아가는 일상일 테다. 한편으로는 그 모든 순간들을 자세히 기록할 수는 없기에, 기억의 저 편으로 홀연하게 사라지는 것이 다반사이기에, 기억하고 싶은 순간의 일부를 수집해 기록하고 그림으로 그리는 일이 더 귀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우리는 삶의 어떤 순간들을 수집하며 살아갈까? 매일 아침 창밖으로 보이는 산의 늠름한 자태와 그 위로 찬란한 빛을 쏟아내는 하늘의 풍경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일도 순간을 수집하는 한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기억 중 행복했다고 느끼는 순간들은 그리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있다. 그보다는 일상의 작은 평화로움 속에서 지어내던 웃음과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시간의 향수가 부여잡은 기억 속 순간들의 파편일지도 모른다. 문득 그러한 순간들을 기록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