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리으리하고 멋진 도서관도 좋지만, 때로는 정말 필요한 것만으로 채워진 소박한 공간이 주는 만족감이 있다. 특히 공공도서관은 집에서 찾아가기에 가깝고 이용에 불편함이 없는 정도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린이와 보호자, 그리고 장애인과 노인까지 고루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런던 서더크Southwark의 이스트스트리트 도서관East Street Library이 바로 그러한 도서관이다. 이곳엔 최근 ‘월워스가 원하는 것What Walworth Wants’이라는 지역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작은 별관(이스트 스트리트 익스체인지)이 생겼다. 적은 예산으로 꾸려져야 했기에 더욱더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공간이다. 새로운 욕구나 필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가려운 곳을 긁는 데 집중하는 동네도서관, 런던 이스트 스트리트 도서관과 서더크의 지역개발 사업을 소개한다.
영국 런던 남쪽의 서더크는 런던 시내의 32개 자치구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지역 중 하나다. 이곳에 로마 시대에도 마을이 있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있을 정도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만
큼, 이 지역에는 테이트모던 미술관, 버로우 마켓, 런던 브릿지등 런던의 명소들이 자리하고 있어 여행자들이 빠트리지 않고 방문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서더크 지역의 북쪽, 도심에 가까운 일부 지역의 이야기다. 남쪽으로 약간만 내려가면 녹음이 진 교외 지역이 나타난다. 월워스는 그 사이, 비교적 한산한 서더크 중앙부에 위치한 작은 동네다.
월워스의 주요 시설들이 모여있는 올드켄트 로드Old KentRoad의 한 모서리에 자리한 이스트 스트리트 도서관은 오랫동안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공공도서관이다. 하지만 시설이 노후한 탓에 책을 읽고 빌리는 공간 이외의 역할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보다 잘 활용될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지만 지역 사정상 대대적으로 건물을 뜯어고쳐 새롭게 꾸미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더크 구는 지역개발 사업을 진행하기 전에 이곳 주민들의 의견을 수집했는데, 이들은 도서관이 번쩍번쩍한 건물로 탈바꿈하는 것보다 오히려 원래 있던 건물에 아주 작은 공간만 더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주민들의 요구에 응해 새로이 증축된 공간이 바로 이스트 스트리트 익스체인지East Street Exchange다. 이름에 걸맞게 도서관을 중심으로 지역 내 교류 활동을 할 수 있는 아담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주로 사업을 하는 청년층이나 지역주민들 간의 크고 작은 소모임 장소로 쓰인다. 도서관 이용 시간 외에도 사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열린 공간이다.
붉은 벽돌의 도서관과 196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 자리한 이스트 스트리트 익스체인지는 쨍한 빨간색 금속 외벽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밤에는 이 작은 빨강 탑이 마치 우뚝 서있는 횃불처럼 보인다. 내부는 열람실이나 모임공간으로 주로 쓰이고 있지만 사실 이곳은 무엇에든 활용될 수 있다. 접이식 가구들을 배치해 유연한 공간으로 조성한 덕분이다. 큰 통유리창을 통해 햇볕이 건물 내부로 충분히 들어오니, 그 안에 앉아서 책 한 권 읽다가 창밖의 거리도 구경할 수 있는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도서관이 마주 보고 있는 올드켄트 로드는 올해 지역개발 사업이 진행되느라 시끌벅적하다. 그런데 이곳의 지역개발 사업은 대한민국의 ‘재개발’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의 재개발은 기존에 있던 것들을 싹 갈아엎고 거대 쇼핑몰이나 아파트 등 수익이 나는 공간을 짓는 사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곳 서더크의 사례는 지역에 필요한 것을 확보하려는 노력에 가깝다. 2015년 계획 수립에 착수하여 2017년에 계획안이 발표되었고, 이후 서더크 의회는 이에 대한 시민 의견을 수집했다. 시민 의견을 반영하여 수정한 계획안이 2020년 12월에 발표됐고, 그에 따라 올해 사업이 진행 중이다. 수용된 시민 의견 또한 인상적이다. 모든 사업의 진행과 건물 신축 과정에서 에너지 절약과 탄소 배출 최소화를 목표로 할 것, 그리고 보존될 지역 유산으로 몇 채의 건물을 추가할 것 등의 의견이 있었다.
크지 않은 예산 안에서 최대한 환경에 악영향 없이 옛것을 계승하고 보다 쾌적한 지역사회를 꾸리려 노력하는 월워스의 지역 당국과 시민들이 주는 묵직한 울림이 있다. 특히 가장 놀랍고 부러운 점은 이 지역개발 사업에서 법으로 규정된 건물 층수보다도 더 낮은 층수까지만 건물을 올릴 수 있도록 제한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보통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이 올라갈 때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높은 건물을 짓는 모습만 봐왔던 터라,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건물들이 그토록 높아야 하는 이유는 뭐였을까. 모두 알고 있듯, 건물과 땅이 곧 돈이기 때문일 테다. 월워스의 새빨간 도서관 별관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우리에게 말을 건네온다. 낭비 없는, 꼭 필요한 만큼의 공간이야말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