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금쪽같은 우리 엄마

에디터 : 전지윤, 김수미, 방연주

언제나 그 자리에 당연히 있어줄 것 같은 엄마에게도 숱한 고민과 꿈, 방황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도 때로는 도망가고 싶고, 말썽도 피우고 싶지 않았을까. 어떻게 엄마는 계속 엄마로 있을 수 있는 걸까. 내가 사라지는 듯 실존이 흐릿해지는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온 걸까. 지나온 시간과 수많은 흔들림, 때로 비집고 튀어나오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사랑과 믿음의 눈으로 관찰하고 이해해주는 시간이 엄마에게도 필요하다.
1-모성이 당연하다는 착각
“근대로의 이행기에는 낡은 제약들이 해체되고 새로운 자유의 공간과 행동의 기회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자결권과 자율성에 대한 요구가 부르주아 사회의 주도적 가치가 된 것이다. 우리는이 같은 내용을 앞에서 언급했지만, 역사를 더 정확히 고찰하면 이것이 남성에게만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여성의 경우, 처음 한동안은 인생 행로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가정에 한정되었다.”
_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모성애의 발명』 중

할머니는 큰며느리가 첫째 아이를 낳았음에도 딸이라는 이유로 몇 개월이 지나도록 며느리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내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난 것은 엄마에게 대단히 다행이었다. 큰며느리로서 의무를 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그랬지만, 정작 자라오는 동안 나는 이런 말을 듣고 자랐다. ‘현대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전통적인 관념을 뛰어넘으며, 여성도 얼마든지 목표하고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이상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부모님 지인의 자녀들이 결혼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때 부모님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사람에게는 때라는 게 있으니 결혼 적령기가 되었으면 결혼을 해야 하고, 여자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늦기 전에 아이를 낳아야 안정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었다. 잠시 학업을 멈추라는 부모님에게 나는 ‘그렇다면 여자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왜 했으며, 내가 굳이 유학까지 가서 수년을 이렇게 공부할 필요가 있었겠느냐’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나의 항변은 최선을 다하신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덜된 인간의 말로 흩어질 뿐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헤드비히 돔Hedwig Dohm은 1903년에 “여성으로 하여금 다른 삶의 요구를 모두 포기하고 출산에만 만족하게 하려는 지나친 요구 때문에 여성들은 출산의 기쁨을 완전히 빼앗기게 될 것”이라 경고한 바 있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오늘 날, 일과 생활, 가정에서 여성의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 답은 실망스럽다. 물론 일과 가정의 양립, 여성의 직업과 가정을 모두 조화롭게 지키려는 정치적인 시도가 계속 있었지만, 그 성과는 미비했다. 가정에 대한 일터에서의 구조적 배려의 부재는 심화되었고, 계속해서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다. 『모성애의 발명』의 추천사를 쓴 출판기획자 강창래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으로서 여성들’은 소극적으로나마 출산을 줄이는 방식으로 그 폭력성에 저항”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는 여성이 가장 이상적인 역할, 즉 어머니의 역할을 맡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워할 것이라 치부한 채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최저 출산율을 계속 경신하며 인구 절벽의 위기를 체감하는 오늘날, 많은 여성들은 어머니가 되길 거부하고 있다.

“임신과 어머니 역할은 여성을 영원히 바꿔 놓는다. (…) 어머니가 되는 것은 세포와 조직 수준의 변화를 넘어 여성 생애사의 전환점을 이루며, 미래에 대한 전망, 기회, 그리고 특히 여성의 우선순위를 바꿔 놓는다. 임신, 진통, 그리고 출산은 두뇌를 변화시킨다. 이들은 신경회로를 만들고 특정 감각, 예컨대 냄새나 청각 같은 능력의 강화를 이끈다. (…) 새로 어머니가된 여성이 (내가 그랬듯) 첫 아기의 출산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어머니의 몸은 아기의 요구와 리듬을 맞춰 합체하게 되고, 아기의 행복은 어머니의 절박한 관심사가 된다. 이 반응의 일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된 것이다.”
_세라 블래퍼 허디, 『어머니의 탄생』 중

미국의 인류학자이자 영장류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Sarah Blaffer Hrdy는 그의 저서 『어머니의 탄생』에서 순종적이고 지극한 모성을 본능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를 분석한다. 그가 비판적으로 인용한 장-에마뉘엘 길리베르의 1770년 논문은 “여성은 다른 모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의 지배 아래 있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자손이 모든 비애의 원인이 된다 하더라도” 모든 고생과 자기 자신을 잊고 “자신의 행복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거북하고 고압적이며 지나치게 윤리주의적인 그의 어조는 반감을 일으킬 만하다. 그러나 길리베르가 설명하는 어머니의 모성 본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좋은 어머니’의 모습과 무섭게 닮아 있다.

임신과 출산을 기점으로 여성에게 신체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나, 모든 어머니의 삶에 획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패턴이나 사건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세대와 사회가 변하는데, 어머니에게 기대되는 규범이 18세기부터 그대로라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어머니란 존재는 이렇다’라는 모든 명제는 결코 자연스럽지 않으며 그와 비슷한 모든 ‘모성’의 정의는 허디의 지적처럼 과학보다는 종교적 율법에 가까운 것이다. 어머니로서 겪는 현실과 과제는 모성이라는 오래된 율법이 만들어진 이후로 전혀 달라졌는데, 사회적인 논의를 통해 이러한 괴리에 대해 이해의 기반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충돌은 있을 수밖에 없다. 시대착오적인 윤리주의와 가부장제에 반감이 형성되고 전통적 성 역할에 거부감이 이는 일은 이처럼 관념이 사회 현실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2-엄마와 딸, 적이 된 진짜 이유
인생 최대의 빌런이 내 엄마, 내 딸인 경우를 종종 보았다. 특별한 상황에 처한 모녀들만 다투는 게 아니다. 자식에게 아주 헌신적인 엄마와, 엄마에게 착한 자식이 되려고 노력하는 딸이 더 싸운다. 나와 엄마도 그랬다. 이제 독립도 했고, 나이도 삼십 대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엄마와의 관계는 여전히 나에게 큰 숙제다. 우리 사이가 그나마 나아진 이유는 그동안 지독하게 싸우면서 조금씩 받아들이거나 포기했거나 서로 조심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게 분명한데 유독 엄마와 딸은 왜 이렇게도 어긋나고 엉키는 걸까. 그것이 오랫동안 궁금했다.

“탁자 아래서 딸애의 두 발이 까닥거린다. 운동화의 뒤축이 비스듬하게 닳아 있다. 올이 풀어진 청바지 밑단도 지저분하긴 마찬가지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인상을 결정한다는 것을 얘는 정말 모르는 걸까. 곤궁한 처지, 게으른 성격, 무신경하고 둔한 품성 같은, 남들이 다 알 필요 없는 너무나 사적인 것들을 왜 이토록 쉽게 드러내 보이는 걸까. 왜 남들이 자신을 오해하도록 내버려두는 걸까. 고상함과 단정함. 말끔함과 청결함. 누구나 최고로 치는 그런 가치들을 왜 깡그리 무시하기만 하는 걸까.”
_김혜진, 『딸에 대하여』 중

가족 간에 ‘지배’라는 말은 좀 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엄마가 딸에게 그리 대단한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다만 소설 『딸에 대하여』의 화자인 엄마가 보여주듯이 그녀들은 운동화 뒤축 같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딸의 모든 것을 꿰뚫고 평가하는 능력을 갖췄다. 그리고 그 사소한 말 한마디는 딸의 중요한 선택마다 길고 질긴 영향력을 드리운다.

나도 엄마와 옷 문제로 가장 많이 충돌했다. 엄마는 자주 본인 취향의 옷들을 사 왔고, 내가 입기를 바랐다. 무슨 배부른 소리냐 싶겠지만 (애초에 그렇게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엄마가 가져다주는 옷들을 순순히 입으면 신발, 머리 스타일, 그다음엔 내가 만나는 사람이나 하려는 일에 있어서까지 자기 뜻에 따르게 할 것 같아 두려웠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엄마가 대신해주는 배려와 헌신은 종종 나를 꼼짝 못 하게 하는 엄마의 무기가 되곤 했으며, 우리 사이에서 엄마는 항상 옳았고, 나는 자주 틀렸으니까 말이다. ‘그깟 옷’에서 시작된 저항은 생각보다 큰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엄마는 딸의 인생을 지배한다』의 저자 사이토 다마키는 모녀 관계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본다. 그는 엄마가 딸의 신발, 옷, 머리 등을 규제하는 이유가 신체적 동일화를 통한 ‘일시적 지배’를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여성은 성 편견에 근거해 신체를 규제하는 사회문화적 훈육 속에서 자라고, 월경 등의 변화를 공통적으로 겪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자신의 몸을 의식한다. 정신분석적 의미로 ‘신체를 소유’하는 존재다. 질병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신의 몸을 의식할 계기가 딱히 없는 남성과 달리 여성들은 여성의 몸을 소유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쉽게 연대할 수 있다. 그런데 모녀 사이에서는 이러한 친밀함이 서로 간의 구별이나 경계를 흐리기 쉽다. 깊은 이해와 공감에 구속이 결합하면서 모녀 관계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나아가 사이토 다마키는 엄마가 일시적 지배를 이룬 뒤, 딸에게 높은 학력이나 출세를 요구하며 자신과 거의 동일한 존재가 된 딸을 통해 인생을 다시 살고자 하는 ‘이차적 지배’로 나아가려 한다고 말한다. 교육열이라고만 이해하기엔 가혹했던 엄마, 안정적인 경제력을 갖춘 남편감을 이어주겠노라 집착한 엄마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까? 엄마는 언제나 나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엄마의 요구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세상의 대리자로서, 욕망을 가진 한 여성으로서 엄마는 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더 넓은 세상으로,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 너는 나와는 다른 삶을 살라고 딸에게 속삭인다. 그러나 그 마음 뒤에는 나와 꼭 닮은 네가, 내 피와 살로 빚은 네가, 내 사랑으로 이만큼 자란 네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기를, ‘내 욕망’을 대신 실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다.”
_이현주, 『나의 가련한 지배자』 중

3-드라마 속 엄마는 진화 중
소셜빅데이터 분석 플랫폼 썸트렌드에 따르면 ‘엄마’는 아기, 우리 집, 동생, 딸, 친구, 여자, 가족, 아빠, 마음, 하루, 눈물, 밥 등이 연관 단어로 나타난다. 좋아하다, 사랑하다, 잘하다, 사랑, 맛있다 등의 긍정어와 울다, 아프다, 힘들다, 미안하다, 서운하다, 도망가다 등의 부정어도 따라붙는다. 이 같은 인식의 범위는 미디어에 의한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미디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 중 하나가 바로 ‘엄마’이기 때문이다. 흔히 미디어를 현실을 인식하는 창이라 여긴다. 그렇다면 드라마에 반영된 엄마는 과연 어떤 표정과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

1990년대만 해도 드라마 속 엄마는 움직이지 않는 석고상과도 같았다. 대중문화 전성기였지만, 유독 엄마의 그늘은 짙었다. 여성이 지고지순한 사랑의 표상이었다면 엄마는 희생의 아이콘으로 반복, 재현됐다. KBS 〈전원일기〉(1980), MBC 〈엄마의 바다〉(1993)에서 엄마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 기울어진 가세를 온몸으로 감내하는 여성을 두고 ‘굳센 엄마’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숭고한’ 엄마로 추앙했다. 가부장제와 성차별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 MBC 〈사랑이 뭐길래〉(1991), 〈아들과 딸〉(1998)에서도 ‘이상적 엄마’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이후 ‘엄마’의 반란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KBS 〈엄마가 뿔났다〉(2008)에서 김한자(김혜자 분)는 대뜸 가출을 선언한다. 40년간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과 자식을 알뜰살뜰 보살폈지만, 어느 날 곶감으로 가득 꿴 줄에 달랑 하나 남은 곶감을 발견하고서 그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마주한다. 급기야 “집을 나가고 싶다”라며 가사노동 해방을 요구한다. 김수현 작가가 “착한 남편을 두고 집 나가는 아내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밝힐 정도로 한자의 가출은 절실했지만, 정작 ‘엄마의 파업’은 부잣집 며느리인 딸과 변호사인 딸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드라마 속 엄마는 이토록 평면적이었다. 모성애와 보살핌을 극대화한 여성은 ‘국민 엄마’로 여겨지고, 이를 거부한 여성은 무언가 잘못된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실제 모성은 임신, 출산, 수유와 같은 생물학적 요소뿐 아니라 양육 및 사회적 요소까지 포함하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드라마와 현실 속 엄마는 가닿을 수 없는 이상적 규범의 억압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모성애’라는 통념이 모성 신화로 굳어진 것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드라마 속 엄마의 역할도 변화했다. 그간 평면적이고 납작한 엄마가 그려졌다면, 다양한 엄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헬리콥터맘’ ‘워킹맘’ ‘전업맘’ 등의 신조어가 나타났다. 그러나 자본과 계층을 둘러싼 엄마들의 분투 역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엄마의 자리가 달라진 듯 보여도, 실상 엄마의 주체성은 주로 남편과 자식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다. 여성 스스로 새로운 권력 관계를 만들더라도 결국 자아를 희생하는 가부장제에 포섭되는 방식이다.

2000년대 시청률 30%대를 돌파할 정도로 호응을 얻었던 MBC 〈내조의 여왕〉이 대표적이다. 경기 불황 속에서 천지애(김남주 분)는 백수 남편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남편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상사 부인에게 아부는 물론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식을 위한 엄마들의 입시경쟁을 다룬 JTBC 〈SKY 캐슬〉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서진(염정아 분)이 딸 예서를 의대에 보내려는 이유는 계층 유지가 아니다. 자녀의 우수한 성적을 통해 알콜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본인의 수치심과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엄마들은 살림만 잘하는 주부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그 역할은 결국 남편의 출세와 성공, 자식의 뒷바라지에 머물고 있다.

황혼기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tvN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나이 든 엄마를 만날 수 있다. 박완(고현정 분)의 엄마 장난희(고두심 분)는 남편으로부터 폭력에 시달리고,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는 등 평생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박완이 한 남자와 인연을 이어가는 엄마를 향해 “엄마, 여자 같아 보인다”라고 하자, 장난희는 엄마이기에 여자라는 성(性)에서 제외되는 것처럼 “남사스럽다”라며 부끄러워한다. 이처럼 드라마 속 엄마의 역할과 지위는 조금씩 다르게 포장될 뿐, 엄마들은 자식의 미래를 위해 쾌락, 야망 같은 영역에서 과도하게 자신의 욕구를 배제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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