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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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19
궤적
Editor. 박중현
사적으로 고른 책에서 하나의 키워드로 불친절하게 이야기합니다.
당분간 한국소설을 더듬습니다.
삶은 흐른다. 사람은 멈추지 않는다. 무엇으로 박제되지 않는다. 박제된다면, 사라지거나 죽어버리거나, 잊히거나 ‘잃어져’ 버릴 때뿐이다. 남겨진 사람은 살아야 한다. 멈출 수도 없고 멈춰서도 안 된다.
소설은 필연적으로 무언가 박제하는 일이다. 힘을 들여 사건이나 사람 혹은 상태나 감정을 활자로 기록한다. 어딘가에 죽은 곤충을 올려놓고 가슴 사이로 기다란 침을 쿡, 박아놓아 날아가지 않게 붙들어 놓듯.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의 형태로 펼쳐낸다. ‘펼쳐’냈지만 그건 박제한 대상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대상에 라벨링을 붙이듯, ‘아 요놈은 이런 것이었지’. (소설이 무엇을 왜 그렇게 해 놓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간 몇 번 얘기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제만으로 소설을 꾸리긴 힘들다. 기대받는 일반적 이야기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 소설에는 변화가 드러난다. 대개 말미에. 긍정적 미래를 보여주거나 그러한 상태로 나아가는 동력(動力)을 묘사하거나 하다못해 그 의지나 씨앗이라도 암시한다. 아니면 아주 확 세상이 망해버리거나. 플롯상 깔끔하도록. ‘뭐야, 그냥 이렇게 끝난다고?’라는 반응은 피해야 하니까. 겁쟁이가 되어선 안 되니까.
하지만 흥미롭게도 근래 한국소설에서 구태여(구태롭다면) 그런 식으로 미래를 향한 의지(?)를 불태우지 않는 작품을 깨나 본다. 하나의 시대 감각일 것이다. ‘그런 게’ 가능하지 않으니까. 작위적이니까. 유치하니까. 오그라드니까. 거기까진 위선이니까. 그냥 내내 이것만 얘기하기에도 벅차니까. 그러나, 다시,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삶은 흐르므로. 아무리 공들여 무언가를 박제했어도, 언젠가는 시선을 거두고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아무도 아닌』과 『디디의 우산』에서 그 궤적을 보아서 참 반가웠다.
여소녀는 d의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했다. 창백했던 피부는 거무스름해졌고 시든 나무처럼 어정쩡했던 자세는 꼿꼿해졌다.—『디디의 우산』 중 「d」
42호 「불친절」에서도 얘기했지만, 『아무도 아닌』은 한 권 내내 멈춰 있다. 인물들은 각 상황 속에서 ‘어째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다 끝난다. 혼자 어딘가에 갇힌 모양새로 고민에 잠겨있다. 두 권에서 모두 등장하는 ‘d’는 직접적으로는 ‘dd’ 의 죽음에 괴로워하며 dd와 살던 방에 틀어박힌다. 간접적으로는 사고 순간 dd의 손이 아닌 자기 가방을 꽉 움켜쥐었던 자신에 괴로워하고, 쓰러지는 노인을 받아주지 않고 비켜서 버린 자신에 괴로워하고, 자신의 부모와 그 밖에 나의 귀책을 명확히 알지 못하겠으나 주변에 일어나는 비극과 ‘패턴’에 괴로워한다. 그런 그가 『디디의 우산』에 와 비로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궤적은 단지 변화 혹은 나아감을 가리키지만은 않는다. 혼자가 아님을 발견하게 해준다. 진정한 변화는 타인에게 발견된다. 밖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혼자만의 생각 속에 살며 그저 하루하루 생을 연명하던 「d」 속 d 자신의 ‘삶 감각’은 타인인 ‘여소녀’에게로 와 비로소 긍정적 언어로 출력된다. 아무 생각 없이 기계처럼 살던 d에게 “너, 나 알지?”라고 물어주어 d로 하여금 ‘내가 그를, 그리고 그들을 알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d 자신에게는 아무 감흥도 주지 못하는 지난한 그의 노동이 가져오는 긍정적 변화를 관찰해주고, 또 발견해준다. 소설 말미에서 d가 오디오의 진공관을 만지고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 있”는 통증을 느끼며 다시금 생을 감각할 수 있었던 건 d 자신의 힘도, d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dd 덕분도 아니다. 타인 여소녀와의 만남이다. 소설 외적인 얘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디디의 우산』에 수록된 또 하나의 중편, 촛불 시위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대표되는 ‘혁명’에 대한 기록인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dd가 황정은 작가에게 쓰라고 한 소설이다. 나로서는 dd가 작가에게 남긴 궤적을 선물 받은 기분이랄까. 혁명 역시 성취가 아니라 궤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조금 더 차분히 많은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세상 속에 아직도 이렇게 말해야 할 것들이 많구나. 그러한 세상 속에서 다들 열심히 움직이고 있구나. 광장이 아니어도 혁명이 아니어도 그저 조용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 베란다를 치우는 일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