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듯 다른 느낌의 사진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쓸쓸한 눈빛을 하고 있다.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화풍이 담긴 이 작업은 사진작가 리처드 투슈만Richard Tuschman의 ‘호퍼 명상Hopper Meditations’ 시리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가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감정은 항상 비슷한 무게와 형태를 지닌다는 감상을 남기는 이 시리즈는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오마주다.
인형의 집 크기의 디오라마diorama와 모델을 촬영해 디지털 합성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호퍼의 그림 속 커플들에게서 보이는 쓸쓸함과 공허함을 잘 드러낸다. 투슈만은 호퍼의 페인팅 스타일과 비전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그의 작업은 사진이 지닌 특유의 색을 입고 더욱 풍부한 표현의 자유를 이뤄냈다.
“나는 항상 호퍼의 그림이 인간 조건의 신비와 복잡성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해왔어요. 소박하고 친밀한 환경에 한두 명의 인물을 배치한 후 조용하지만 매력적인 기운이 감도는 내러티브를 형성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등장인물의 감정 상태는 환상과 소외, 또는 그리움과 체념 사이에서 역설적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조명을 극대화해 감정적인 배음을 고조시키지만 이미지의 최종 해석은 역시 보는 사람들의 몫이지요.”
투슈만의 사진들은 호퍼의 그림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사진이 이루는 전반적인 분위기는 호퍼의 것보다 더 어둡고 무겁다. 그의 사진은 한두 명의 등장인물로 이루어지는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조명이 이미지에서 큰 역할을 하는데, 특히 방 안의 공기와 인물의 내면을 차지하고 있는 갈등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등장인물들의 표정은 체념한 듯 고독해 보이지만 끝없이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다. 마치 연애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욕심으로 인해 스스로 더 견고한 벽을 쌓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듯한 사진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과묵한 이미지 속에서 우리는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자꾸만 유추하게 된다.
침대에 앉아 창밖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한 여인은 사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자신을 채우는 상념들에 한없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스스로 묻지만 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빨강 머리 여인이 의자에 앉아 연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구두와 방 안을 채우는 대부분의 사물들은 또다른 사진에서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지만, 창을 통해 들어오던 빛의 밝기로 시간이 경과했음을 알 수 있다. 한 장의 제목은 ‘새벽 4시’, 다른 한장은 ‘아침’이다. 늦은 밤부터 기다리던 연인의 전화는 오지 않고, 아침이 되자 여인은 침대 시트를 몸에 걸치고 서랍에서 옷을 꺼내다 말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의자에 앉아 전화기를 응시한다. 매력적인 빨간 드레스를 입고 침대에 걸터앉은 여인과 세면대 앞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무심한 듯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 여인의 표정으로 봐서는 속시원한 대화가 오고 가지 않은 듯하다.
연애의 감정은 언제나 매혹적으로 다가와 온 마음을 빼앗지만, 그 옛날 에드워드 호퍼와 오늘날 리처드 투슈만이 표현하는 것은 사랑 뒤에 찾아오는 수많은 다른 감정들과 권태다. 호퍼의 그림들이 산업시대의 인간성과 관계에 관한 상실감 내지 공허함을 표현한 것이라면 투슈만의 사진들은 엄청난 기술의 발전을 이룬 현대인들이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마주하게 된 권태를 표현하는 것일 테다. 수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연애와 사랑은 항상 제자리걸음이다. 우리는 왜 사랑을 나눌까? 그리고 어느 순간 어떤 변덕스러운 바람이 불어와 우리를 한순간에 쓸쓸함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