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즐겨보는 책 중에 『캐릭터 전국 도감』이란 책이 있다. 1세대에서 8세대에 걸쳐 수많은 몬스터들이 지역별로 분포되어 있으며, 각각 어떻게 생겼고 진화 단계에 따라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다양한 도표와 그림을 통해 꼼꼼히 설명하는 책이다. 실물을 대신해 그림이나 사진으로 온갖 호기심을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 도감의 미덕이라면, 그 대상이 몬스터라 할지라도 이처럼 정교하고 세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 도감으로 함께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대상이 있다. 우리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엄마’다.
전쟁 같은 사랑
아기를 낳고 일주일 만에 다시 일을 하러 나갔다. 아기를 봐주는 분을 구했고, 친정엄마도 길 건너에 살고 계시니 크게 걱정할 일은 없었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곧장 샤워를 하고 베르가모트와 오렌지 향이 나는 오일을 듬뿍 바르고 나서야 아기를 안았다. 종일 바깥에서 지내며 묻은 먼지와 온갖 냄새를 아기에게 나눠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체취가 향기롭기를, 그저 좋은 냄새로만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내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혼자 아기를 돌보게 된 첫 주말이었다.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아기는 몸통, 팔, 다리 어디 하나 작고 가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자칫 잘못 만지면 부러질까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열심히 먹고 싸고 울고 자는 이 생명체가 자신의 삶 전체를 오롯이 나에게 맡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나고 부담스러웠다. 아름다운 인사와 미소만 건네는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현실은 매일 아침 파이팅을 외치며 시작하는 육아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엄마가 된 순간부터 하루하루가 도전과 극복의 연속이었다.
뜻밖의 관찰자
“엄마가 태어났습니다. 나와 함께.”
『엄마 도감』은 지난날의 나처럼 고군분투하는 초보 엄마를 연구하고 기록한 책이다. 그런 엄마를 관찰하는 화자는 다름 아닌, 갓 태어난 아기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퉁퉁 부은 채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잠에 빠지는 엄마를 아기는 걱정한다. 아침엔 침대였다가 저녁엔 비행기가 되고 구석구석 접었다 펼쳐지는 엄마의 몸이 아기에겐 신기한 놀이터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마다 중요한 연구라도 하는 듯이 책을 살피는 엄마를 보며 아기도 덩달아 심각해진다. 자신이 아주 작은 소리라도 내면, 아무리 깊은 밤이라 할지라도 날쌘 동물처럼 재빨리 달려오는 엄마에게 초인적 능력이 있는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아기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과 소통 안 되는 아기에게 허둥대며 쩔쩔매는 모습까지, 엄마가 된 한 존재의 변화를 기록하는 아기의 시선은 세세하고 면밀하면서도 새롭다. 아기의 탄생으로 이전과 다른 무엇이 된 여자, 엄마의 탄생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너무나 현실적인 나머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아기는 이번 생이 처음이고, 엄마 없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게 거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엄마 도감』에서 아기는 관찰자로서 주체적 역할을 획득하고, 이로써 독자는 아기에게 집중하느라 뒤로 밀려났던 엄마의 존재감과 무게감에도 주목할 수 있게된다. 아기의 눈으로 바라본 엄마는 더 이상 희생과 헌신의 상징이지만은 않다. 엄마는 엄마가 처음인 한 생명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인 아기와의 삶에 대응하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서로와의 동행을 위해 사력을 다하기는 엄마나 아기나 똑같다. 아기의 성장과 함께 엄마도 자란다. 점점 아기에게 특화되어가는 엄마처럼 아이 또한 저 나름의 방식으로 엄마를 알아가기 위해 집중한다.
처음이라 그래
“엄마는 아기와 함께 태어나는 신생 인류입니다. 아기 성장에 관한 보고서는 쌓여가고 있지만 신생 엄마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요. 왜 누구도 갓 태어난 엄마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요. 모든 것이 처음인 세상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을 갓난 엄마들을 생각하며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권정민 작가는 전작들에서도 전복적인 시선으로 식물, 동물등의 약자나 다수자를 조명해 왔다. 『엄마 도감』에서는 그 자리에 ‘모성’을 둠으로써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온 엄마를 낱낱이 다시 살핀다. 양육과 교육 관련 논의에서 다수자로 위치하던 ‘엄마’를 오히려 관찰 대상으로 만드는 이 같은 역발상과 사실적인 묘사는 모성의 신화화를 거부하는 각성의 장치로 작용한다. 작가는 “오랫동안 사회가 말해온 엄마의 모습이 아니라, 그런 엄마를 모르는 아기의 시점으로 관찰”하며 엄마의 존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일방적으로 보살핌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닌 아기의 역할에도 집중한다. 그럼으로써 엄마도 아기도 모두 똑같이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알리고, 둘의 건강한 관계 맺음을 응원한다.
어느 초보 엄마가 내게 시간이 지나면 조금 나아지느냐 묻는다면 해줄 위로나 격려가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밤에 수유하거나 기저귀를 갈아줄 일 없이 아침까지 쭉 잘 수 있게 됐다는 사실 외에는… 어쩌면 아이도 엄마인 나도 여전히 처음 만나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함께 배우고 깨쳐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처음의 시간들 속에서 좌절하고 눈물 훔치며 다시 한 발을 내디딜 갓난 엄마들에게 이 책으로 응원을 대신하고 싶다.
“나는 아마 여기 화분 옆이나 철쭉 무더기 사이 어디쯤 버려졌을 것이다. 이 작은 틈. 여기서 혼자 울었을 거다. 누군가 발견하기 전까지. (…) 엄마가 그랬다. 누구한테나 시작이 있다고. 그게 보통은 엄마 옆인데 나는 여기였다. 누구나의 처음이 나한테는 없는 것이다. 없는 건 아니다. 내가 모를 뿐. 그걸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도대체 누굴까. 그게 누구든 절대로 찾지 않을 거다. 나를 만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거면 됐다. 두 번 다시 여기도 오지 않을 거다.”
자신의 출생과 어린 시절을 그림자처럼 여기는 아이의 일화는 황선미 작가 특유의 사실적이고 섬세한 심리 묘사와 만나 마치 현실 속 어느 아이의 이야기처럼 펼쳐진다. 빛나라가 선생님께 지적을 받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할 때엔 마치 내가 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식은땀으로 온몸이 푹 젖은 채 꿈에서 깨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면 빛나라의 엄마가 되어 끙끙거리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야기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하기로 알려진 황선미 작가는 『빛나는 그림자가』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고민까지 끄집어 내 다독여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