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람들은 무얼 하며 명절을 보낼까? 생일에 파티를 할까? 어떤 연애를 할까? 불륜의 현장을 목격한 배우자는 상대방을 어떻게 응징할까? 왕따나 은따가 존재할까? 우리는 북한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는 그들의 삶은 한 프랑스 사진작가의 사진을 통해, 그것도 상
당히 제약된 환경 속에서 가까스로 표출되었다. 이 역시 진실이 가려진 무언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뷰파인더 안에 담긴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에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순수함과 온화함이 들어있다. 겨우 드러난 그들의 삶은 여전히 비밀스럽고 여전히 부자연스럽지만, 그들에게 가졌던 고정관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준다. 사진 기술이 열어준 또 하나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겠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 북한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나라이자 그 내막이 가장 알려지지 않은 나라로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 사람들을 두고 상당히 제한된 삶을 살아가
는 존재로 인식하곤 한다. 좀 더 분석적으로 접근하자면, 전쟁에 혈안이 된 선전 문구들, 기근, 반체제, 핵미사일 프로젝트, 군사 퍼레이드가 등장하는 대대적인 화면 뒤로 분명 더 복잡하고 급진적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또 군사적 맥락에서 독재정권은 국민을 감추는 것으로 그 압도적인 힘을 과시했다. 민족주의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 사진작가 스테판 글라디우Stéphan Gladieu는 북한의 비극적인 운명과 인민들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초상을 촬영하는 작업을 택했다. 이는 대단한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작품이 품고 있는 내용과 형식, 이념의 관계를 밝혀내는 도상학은 주로 정권의 상징적 인물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이는 선전의 독점 무기로도 쓰인다. 북한에서는 정권의 건국자인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의 초상화만을 전시할 수 있다. 가족사진이나 개인의 초상화는 있을 수 없다. 집단적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큰 축을 떠받치는 국가에서 개인의 현실이 존재할 틈은 없다. 북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촬영하기 위해 한동안 북한에 머물렀던 스테판 글라디우는 걷는 걸음마다 감시를 받아야 했고, 그의 모든 행위는 감독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다. 이에 따라 글라디우는 자신에게 부과된 틀 안에서 자유의 공간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이 사진 시리즈가 탄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북한에서 만난 사람들과 형성한 관계의 힘이 컸다. 얼굴 정면과 직접적인 시선이 필요한 초상사진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북한의 선전에 보다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는 북한 사람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 촬영 방식이기도 했다. 개방형 국가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세계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사진 속 인물들은 상당히 경직되어 보이겠지만, 동시에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몰이해 또한 매우 고착화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