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한국에 크게 붐이 일었던 ‘도시재생 프로젝트’에는 다소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의미의 층이 많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의미가 과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재생’되는 건물과 달리 유적이나 보물로 지정되어 원형 그대로 복원, 보존되는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씁쓸해지고 만다. 새 목적을 입었다는 사실 자체가 해당 공간에 그만큼 역사적인 중요성이 있지만, 그대로 두어서는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대한민국만의 사정이 아니라 근대화와 식민지배, 전쟁, 급격한 경제 발전과 같은 질곡의 현대사를 거친 많은 나라들이 공유하는 역사적 상흔이다. 이러한 아픔을 고스란히 담은 채 재생된, 대만의 도서관을 소개한다. 이름마저 ‘그냥 도서관은 아닌’ 곳. 이 도서관에 깃든 여러 의미망에서 한국의 근대사와 역사적 유물을 새로이 보는 눈을 뜰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대만의 근현대사에서는 한국의 것과 비슷한 장면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경상도와 비슷한 면적의 대만은 50년 동안 일본의 통치를 받은, 일본제국의 첫 식민지였다. 1895년 청일전
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었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한 뒤 중국에 반환되었다. 일본 식민지배 직전에 중국 본토에서 이민을 간 중국 국민당 계열 인사들과 대만의 시민들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맞서 저항했던 역사도 있다. 조선이 그랬듯 전쟁에 동원되던 1930년대 후반부터는 대만도 모국어 사용을 전면 금지당하고 신사참배가 강요되기도 했다. 지금의 한국에 남북한으로 분단된 아픔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만 역시 식민지배 역사로 인해 중국 본토와 전혀 다른 근대사를 갖는다. 무엇보다 지난한 현대사에서 파생된 문제들이 사회 차원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 깊숙이에 남아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비슷한 곳이 대만이다.
‘낫저스트라이브러리’는 타이베이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송산문화창의단지’라는 테마공원의 일부로, 이곳 전체는 1937년도에 건립된 담배공장이었다. 당시는 일본 제국이 조선과 대만 모두에서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던 시기로, 이곳의 이름은‘대만 총독부 전매청 송산 담배공장’이었다. 대만 최초의 담배전문 공장이기도 했던 이곳은 당대 기준으로는 최첨단 시설을 갖췄었다고 한다. 1945년 일본이 철수한 뒤에도 공장은 계속해서 담배를 생산했고, 공장 가동이 중단된 것은 불과 20여 년 전인 1998년이다. 지금은 담배공장 부지 전체가 디자인 문화 단지로 새로이 조성되었다. 타이베이 내에는 이곳 외에도 오래된술 공장을 탈바꿈시켜 만든 ‘화산 1914’라는 문화예술단지가 있다. 이 모든 재생 프로젝트는 역사가 있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자는 목적 아래서 이루어졌다. 작년에야 완공되어 공개된 낫저스트라이브러리는 단지 내 다른 건물들에 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재생된 공간으로, 원래는 담배공장의 여공들이 이용하던 목욕탕 건물이었다.
한국에서 공중목욕탕은 근대화와 함께 등장했다. 초기에는 지배층의 휴양과 유흥을 위한 곳으로 주로 소비되었다고 한다. 공중목욕탕 수가 크게 증가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1960~80년대, 급격한 도시화와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면서부터였다. 특히나 도시에 모여 살게 되면서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농촌 같은 곳에서는 마을 단위로 함께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으니, 도시화 과정에서 공중목욕탕이 사회 전체에 필요한 시설이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목욕탕과 지금은 도서관이 된 여공 전용 목욕탕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을 것 같다.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는 공장 일꾼들은 종일 일본제국의 담배를 생산하고 목욕탕에 가 하루의 노고를 풀며 마음 놓고 쉴 수 있었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한편 낫저스트라이브러리는 대만 최초의 디자인 특화 도서관이다. 3만 권 이상의 국내외 디자인 관련 서적이 비치되어 있고, 100가지 넘는 디자인 관련 잡지도 열람할 수 있다. 단지 내
의 전시공간들과는 별개로 ‘부찌쉬 3x3(不只是3x3)’이라는 작은 갤러리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전시들을 선보인다. 도서관 로고는 대만을 대표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인 아론 니에Aaron Nieh가, 내부 설계는 대만의 유명 건축가인 야오첸쫑Yao Cheng-Chung이 맡았다. 도서관 내부는 오래된 건축물 특유의 창문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는데, 따뜻한 햇볕이 비치면 공간 전체가 보다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같은 아름다움을 두고 야오첸쫑은 ‘와비사비(わびさび)’라는 말로 표현한다.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으로 알려진 와비사비 스타일은 풍요롭고 완벽한 미가 아니라, 오래되고 부족할 수 있지만 본질적이고 깊이가 있는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도서관 정원에도 이 분위기는 연속된다. 세월이 그대로 느껴지는 회색 외벽과 창문에 어울리는,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 정원 디자인은 편안히 건물과 공명한다.
도서관 내부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고 전용 실내화로 갈아 신어야 한다. 목욕탕 입구에서 탈의실로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행위, 더불어 한국에서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적 내부에 입장할 때 실내화로 갈아 신는 행위가 함께 떠오른다. 하지만 이곳은 왕족이 사용하던 궁궐이 아니라, 일반 민중이 사용하던 목욕탕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도저히 책만 읽다 나올 수 없는, 구석구석 찬찬히 둘러보고 만져봐야 할 도서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