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ic : 이달의 화제

오늘의 만화

에디터 : 전지윤, 김수미, 이재민

근대 만화 연구자였던 데이비드 쿤즐David Kunzle에 따르면 만화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갖는다. 첫째, 칸으로 분리된 이미지들의 연속성. 둘째, 글보다 그림의 분량이 많을 것. 셋째, 대중적으로 전파가 가능한 인쇄 매체를 통해 재생산될 것. 넷째, 도덕적이며 시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그러나 매체 및 정보 기술의 발달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온 만화는 우리가 생각하던 모습과 판이해졌다. 이달의 토픽에서는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시대의 새로운 문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수많은 영상 매체의 무궁무진한 원천 소스로 기능하는 오늘의 만화 면면을 짚어본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 콘텐츠가 완성도와 대중성을 인정받는 상황 속에서 한국 만화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제언에도 귀 기울여본다.
1-그래픽노블, 그림으로 만나는 새로운 문학
“그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만화책을 읽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마치 자신이 쓸모 없는 일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대부분 사람들이 어린애들과 단순한 청소년들, 모자란 젊은이들이나 읽는 거라고 생각하는 만화 산업에 몸담고서 대체 어떤 인생을 살 수 있을까?’”
_밥 배철러, 『더 마블 맨』 중

마블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탠 리Stan Lee는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국가예술훈장을 받은 권위있는 만화가지만, 그에게도 만화에 대한 대중의 다소 부정적인 인식은 늘 고민거리였다. 그러나 2018년 스탠 리가 95세로 세상을 떠날 즈음 마블의 영웅 캐릭터들은 대중에게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게 되었으며 마블에서 제작한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개봉과 동시에 대단한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렇듯 만화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으며, 쉽고 유치한 것이라 여겼던 인식 역시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저명한 만화가인 스콧 맥클라우드Scott McCloud는 『만화의 이해』에서 만화란 ‘수용자에게 정보를 전달하거나 미학적 반응을 일으키기 위하여, 의도된 순서로 병렬된 그림 및 기타 형상들’이라 정의한다. 그림과 글을 적절히 혼합하여 내용의 이해를 돕고 지루하지 않도록 전개하며, 시각적 임팩트를 조절해서 칸 안에서의 시간의 흐름 또는 생략된 시간을 연상할 수 있도록 계산해 배치하고, 정밀한 계획과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에 맞는 표현까지 적절히 구현해야 좋은 만화 한 편이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만화가 ‘영화나 회화의 화상 묘사 능력에 글의 친밀함을 더해 폭넓은 가능성과 자유로움을 제공하며 주제와 형식에 있어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만화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은 여전히 남아있다. 예컨대 로이스 로리Lois Lowry의 『기억 전달자』를 읽을 때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독서를 하고 있다’고 간주하지만 이를 각색한 그래픽노블을 읽는 것은 여전히 오락이나 놀이 행위로 여겨지는 이유도 이러한 편견이 작동한 탓일 것이다.

2-만화책을 찢고 나온 주인공들
‘만찢녀’ ‘만찢남’은 순정 만화 속 주인공처럼 빼어난 미모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다. 그러나 요즘에는 꼭 외모가 출중하지 않아도 탄탄한 서사 속에서 매력을 갖춘 캐릭터들이 만화 너머의 세계로 자유롭게 진출 중이다. 〈오징어 게임〉의 명맥을 이으며 공개 하루만에 전세계 넷플릭스 시청 1위를 차지한 드라마 〈지옥〉이 화제가 된 이유가 단순히 캐스팅이나 이색적인 소재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습지 생태 보고서』 『100℃』『울기엔 좀 애매한』 등의 만화책과 웹툰〈송곳〉 등을 통해 치밀한 줄거리 속 날카로운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온 최규석의 웹툰을 원작으로 했기에 그 기대감은 더욱 견고했다. 실제 원작 웹툰에 대한 해외 문의가 쇄도하는 중이라고 한다. 애플TV플러스는 한국 상륙을 기하여 이선균 주연의 드라마 〈닥터 브레인〉을 내세웠다. 이 역시 기발한 스토리의 장르물로 꾸준히 인정받아온 홍작가의 동명 웹툰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어지간한 기대작들이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현상은 이제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다. 영상·미디어 시대, 만화는 독자적인 콘텐츠로서 뿐만 아니라 여타 콘텐츠의 원전으로서 독보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만화 속 세계가 오늘날과 같이 영상 매체 안에 중첩되기 이전에 일어났던 중차 대한 사건으로 웹툰webtoon의 탄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웹툰은 인터넷 상의‘웹web’과 ‘카툰cartoon’의 합성어로, 웹에 게시되는 만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문헌상으로는 웹툰의 등장을 2000년 무렵으로 꼽는다. 2000년 라이코스, 2002년 야후코리아 등 포털들의 웹툰 서비스에 이어, 2003년 다음이 ‘만화속세상’이라는 코너를 만들었고, 2004년 네이버 웹툰 포털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웹툰의 시대가 열렸다. 특히 다음, 네이버 등의 대형 포털 사이트가 적극적으로 웹툰의 플랫폼 역할을 함으로써 대규모 독자들의 접근이 가능해졌다. ‘한국 최초의 웹툰’으로 여겨지는 작품은 평범한 네 사람의 연애담을 다룬 강풀의 장편서사만화 〈순정만화〉다. 이전에도 웹 게재를 목적으로 창작된 만화 작품들은 존재했지만 〈순정만화〉를 기점으로 지금 처럼 웹툰이 포털 사이트에 연재되거나, 세로 스크롤 독서 방법이 정착되는 등의 웹툰 소비 경향이 완성되었다.

만화가 단지 웹으로 옮겨갔다고 해서 모두 웹툰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국 그래픽노블이나 일본 망가의 경우 출판물에서 웹으로 옮겨간 작품들을 ‘웹 코믹스web comics’라고 부른다. 이들의 형식은 출판만화와 동일하다. 반면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그 특성을 발전시켜온 웹툰은 출판만화와는 전혀 다른 문법을 구사하기 때문에 웹코믹스나 출판만화와 구분된다.

출판만화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스토리를 연결하고,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 아래로 읽어나가지만, 웹툰은 스크롤바를 이용해 위에서 아래로 읽는 방식이다. 세로로 전개되는 이야기 방식은 생각 이상으로 혁신적인 독서 경험을 제공했다. 빠른 스크롤은 영상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거대한 이미지를 천천히 카메라 워킹으로 살피는 효과 등의 연출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출판만화에 존재해온 편집자와 유통업체가 생략된 채 작가와 독자가 1대1로 소통하게 된 것 역시 커다란 차별점이다. 또한, 별점이나 댓글로 감상평 등을 남김으로써 독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대중의 접속과 평가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객관적 데이터가 쌓이게 되었고, 이를 통해 각 작품이 가진 스토리텔링의 가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도 있게 되었다.

3-2021, 한국만화의 좌표를 찾다
지난 10월, 마영신 작가의 그래픽노블 『엄마들』이 하비상 ‘2021년 최고의 국제도서’ 부문에 선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비상은 미국의 전설적인 만화가이자 편집자였던 하비 커츠만 Harvey Kurtzman을 기리기 위해 1988년부터 이어져 오는 시상식으로 ‘만화계의 오스카’라 불린다. 지난 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다룬 김금숙 작가의 『풀』이 한국 그래픽노블 사상 최초로 하비상을 수상한 것에 이은 2년 연속의 쾌거다. 수상 소식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연예지 『데드라인Deadline』에서는 『엄마들』의 미국 드라마화 소식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이 케이팝과 여러 영상물에 이은 한국 콘텐츠의 또 다른 성과인지, 아니면 일시적 현상인지 아직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만약 한국 작품들이 이뤄낸 성과라고 본다면,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접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만화는 여타 도서상에서 국제 도서International Book로 분류되어 심사를 받지만, 일본만화는 전체 작품이 경합하여 최고의 만화를 뽑는 부문에서 대등하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그동안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화는 일본만화를 지칭하는 ‘망가’의 아류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글로벌 독자들이 ‘Manhwa(만화)’와 ‘망가’의 차이점을 탐구하고, 세로 스크롤 방식의 웹툰과 종이만화의 차이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등 그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 아래서 ‘Manhwa’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제 막 한국만화의 독창성을 글로벌 시장의 독자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20 만화백서’에 따르면, 전 세계만화 시장은 대략 15조 원 규모다. 그 중 일본 시장이 약 6조 원을 차지하고 있고, 한국과 미국이 대략 1조 원 내외로 2, 3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중 웹툰과 디지털만화(e북)를 총합한 시장이 대략 7조 원 수준이다. 종이만화가 대세를 이루던 일본에서 조차 2019년 처음으로 디지털 시장이 종이책 시장을 역전한 후 2년 연속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을 보면, 향후 디지털 시장이 종이만화 시장과의 격차를 더 벌릴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만화 시장이 15조 원 규모라고 하니 엄청 거대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국 게임 시장의 규모만 2020년 기준 17조원에 달한다. 전 세계 게임 시장 규모는 200조 원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만화는 아직 매우 작은 규모인 셈이다. 그러나 만화 시장의 저력은 무서운 성장세에 있다. 2021년 3분기 네이버웹툰과 카카오엔터의 실적보고에 따르면, 네이버웹툰은 지난 분기 대비 27.2%, 작년 3분기와 비교해서는 60.2% 성장했으며, 카카오엔터는 지난분기 대비 17%, 작년 동기대비 47% 성장했다. 최근연평균 성장률을 대략적으로만 추산해도 30%가 훌쩍 넘는다. 카카오와 네이버의 웹툰 플랫폼이 올해 발생시킨 매출액만 2조 원에 가까울 것으로 전망된다. 다른 산업계와 비교가 무색 할 정도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웹툰 시장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다.

연재 위주로 상업시장을 형성한 한국에서는 가급적 오래 연재하는 것이 일종의 미덕이되었다. 따라서 단행본 한 권 안에서 완결성을 갖는 그래픽노블 등의 출판만화 같은 경우, 그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플랫폼 기반의 웹툰 산업이 성장하는 만큼, 출판만화 분야에서도 작가들이 자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독자들과의 접점을 늘리기 위한 방법을 찾는 중이다. 독립만화를 소개하는 플랫폼 사이드비(www.sideb.kr)는 온오프라인에서 만화 전시회를 여는 한편, 최근 성수동에 동명의 만화 전문 서점을 열었다. 10년 넘게 유지되어온 창작집단 ‘쾅quang’은 단편만화 모음집에 가까운 형식의 잡지 『쾅코믹아트매거진』을 발행하고 있으며, 1년에 9곳의 지역 도시를 소재로 9권의 만화책을 만드는 ‘지역의 사생활99’ 시리즈처럼 참신하고 의미있는 기획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최근다양성을 추구하는 만화잡지 『얼룩Err.look』에서 발행한 1호의 테마는 ‘절대로 영화로 못 만들 만화’다. ‘손으로 직접 넘기는 만화책의 맛을 다시 한번 살려보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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