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업무 미팅 차 어느 꽃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사장님과의 사전 인터뷰를 위한 첫 대면 자리였는데, 오전 10시에 시작한 미팅은 점심 시간을 훌쩍 넘겨 끝났다. 거진 세 시간이나 대화를 나눴고 심지어 한 시간 정도는 인터뷰와 전혀 상관없는 사적인 얘기들이 오갔다. 솔직히 스스로도 많이 놀랐다. 직업상 온갖 결의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고 글로 쓰긴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타인의 삶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마음이 풀어지면서 입도 풀려버렸고, 사장님 역시 때로는 들어주고 때로는 질문하며 대화에 많은 공을 할애했다. 모든 관계엔 나름의 시간과 서사가 있을 텐데, 일로 처음 만난 사이인 우리는 물 흐르듯 빠르고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건너갈 수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 했을까 며칠을 곰곰 생각했고, 그 의문을 따라가다 보니 알게 됐다.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푸르스름한 찻물도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었다는 걸.
『차와 일상』은 스테디셀러 『오후 4시, 홍차에 빠지다』를 비롯해『차를 타고 떠나는 차 여행』 『홍차가 더 좋아지는 시간』 『차 상식사전』 등 차 관련 서적을 꾸준히 펴내온 이유진의 ‘차 생활 안내서’다. 차에 관한 상식과 함께 저자가 티 소믈리에로서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완성한 차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긴 하지만, 내비게이션처럼 완벽하게 짜여 있지는 않다. 어쩌면 표지판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차 생활이라는 새로운 여행을 향해 떠나려는 이들의 기운을 북돋으며 각자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이끄는 길잡이. 때와 장소, 기분과 감정, 필요와 관심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는 티타임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하는 책이니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를 한 번쯤 마시는 게 꿈이라는 저자는 15년차 아침형 인간이다. 기상 시간은 새벽 5시. 자고 일어나면 가장 먼저 오일 풀링과 양치를 하고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마신 뒤 요가 수련을 시작한다. 코로 들어온 호흡을 사지 근육으로 보내며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는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오직 자신의 정신과 육체만 놓인 상태가 된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요가 수련으로 얻은 열기를 한풀 가라앉히고 나면 어느덧 두 아이를 깨울 시간. 계절에 맞는 간단한 음식과 제철 과일, 여기에 차 한잔을 따뜻하게 우려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다. 14년째 지켜오고 있는 그의 아침 루틴이다.
"차를 우려내는 3분. 사르르 조용히 모래시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말린 찻잎이 피어나고 찻물이 점점 붉게 물들어간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나홀로 누리던 힐링 타임이었다. 지금은 차가 우러나는 동안 테이블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아이들이, 아침에 읽을 책을 한 권씩 손에 들고 사락사락 책장을 넘기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엄마 미소를 가득 짓는다."
하루에 한 번씩만 마셨다고 해도 이미 5천 번은 거뜬히 넘었을 그에게, 차는 이제 단순한 취미의 의미를 넘어선다. 처음 차를 마시던 그 시간들은 오롯이 자기 자신을 위한 별세계였다. 홀로 차분히 갖는 티타임은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끄는 도구였고, 지친 심신에 환기가 필요할 때 굳이 멀리 나서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휴식처였다. 그 다붓한 시간 속에서 그는 매일 조금씩 더 부드러워지고, 또 강해질 수 있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정히 살피는 엄마와의 아침 찻자리를 통해 아이들 역시 성숙해지는 걸 느꼈다. 함께 차를 나눠 마시며 대화가 무르익을수록 차 맛도 왠지 더 좋아졌다. 맛이 그 자리에서 숙성되는 것 같달까? 차가 우려내는 식탁 위의 살가움은 혼자서 누리는 호사를 뛰어넘는 기쁨이었다. 이렇듯 누군가와 함께 마실 때 그 의미와 즐거움이 배가되는 차를 두고 저자는 “관계를 쌓아가는 시간”에 비유한다. 차 시간이 맺어준 따스한 순간순간이 쌓여 각자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차 생활을 통해 평온을 찾고, 그 평온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저자는 차가 가족과 손님을 대접하기 훌륭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차를 자기 안으로 들이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차 한 잔을 우리고 나누는 일은 짐짓 간단해보이지만 그 아름다움이 온전히 드러나기까지는 몸과 마음의 수고를 필요로 한다. 마시는 사람의 기호를 살펴 찻잎을 고르고, 차의 종류에 따라 물의 온도와 우리는 시간도 세심하게 조절해야 하는 등 모든 과정마다 정성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섬세한 배려와 시간적 여유를 들여야만 완성되는 음료이기에, 찻자리를 주재하는 이의 마음가짐에도 평온함이 녹아들기 마련일 것이다. 그 부드러운 태도는 찻잔을 받아든 상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차가 주는 감동이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차는 다른 음료에 비해서 준비하고 우리는 시간을 들여야 하기에 마시면서 더 큰 여유를 찾게 된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들여야지만 만날 수 있는 시간, 아이러니하지만 그런 덧없이 느껴지는 순간들로 우리는 여유를 느낀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일상이 되면 더 이상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행위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만큼 우리의 매일은 여유가 가득한 풍요로운 나날이 된다."
처음보는 사람에게 몇 시간이나 정성스럽게 차를 대접받고 온 그날, 잠들기 직전까지 내내 훈훈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좋은 날, 그 좋은 기억을 뒤로하고 다음날 아침부터 바로 커피를 찾긴 했지만, 그날의 여운은 여전히 은은하게 각인되어 있다.
과하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은 온기가 그리울 때면 나는 사장님께 안부 문자를 보낸다. 괜한 부담을 드리는 건 아닐까 주저하던 두 엄지 손가락이 무색하게, 사장님은 “언제든지 차 마시러 오세요!”라는 답을 주신다. 단언컨대 사장님은 항상 자신에게 하듯, 성심껏 차를 우려 내게 권할 것이다. 그 따스한 마음을 불쑥 닮고 싶어지는 어느 아침엔 어설프게나마 혼자 차를 내려 마셔본다. 거실 한 편을 가득 메운 차 향을 음미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오늘 하루 향기 나는 말과 행동가짐을 다짐하게 된다. 이것이 차의 마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