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유행처럼 번진 ‘미니멀 라이프’는 수많은 물건과 사람에 둘러싸여 사는 현대인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빽빽한 도시에 지친 사람들은 정돈된 공간을 원한다. 자기 몸하나 편히 뉘기 힘든 원룸을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청년들은 호텔로 휴가를 떠나기도 한다. 과로한 뇌를 잠시 쉬게 하기 위해서라도 별다른 자극이 없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감각 자극을 처리하고 어떤 행동을 개시하는 지각 과정이 뇌의 주요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쉴 만한 공간들을 찾아 나선다. 복잡다단하고 시끄럽던 머릿속이 고요해지고, 그로 인해 삶이 더욱 풍성해지도록 하는 쉼을 제공하는 도서관이 포르투갈에 있다. 이곳에서는 책 읽기도 생산적인 활동이 아니라 그저 휴식일 수 있다. 단순해서 편안한, 그란돌라 시립도서관Grândola’s Library이다.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의 서남쪽 끝, 아프리카 대륙 가까이에 위치한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나라다. 그란돌라는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 아래쪽에 위치한 도시로, 이곳 시립도서관은 시
의 중앙부 광장을 마주하는 위치에 있던 오래된 도서관을 재건축해 지어졌다. 겉으로 보기만 해서는 재건축된 건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렵다. 희고 두터운 건물이 주는 압도적인 느낌 때문이다. 설계를 담당한 마투스 가메이루 건축사무소Matos Gameiro Arquitectos와 페드로 도밍고스 건축사무소Pedro Domingos Arquitectos는 부실했던 건물을 두꺼운 벽으로 보강하고, 마치 거
대한 틀에 얼린 얼음 조각처럼 단단해 보이는 건물을 올렸다. 도서관을 마주보는 광장에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야자나무 열두그루 역시 울창하던 나무들을 정돈하고 새로이 조성한 것이다.
흰 벽에 수평으로 넓게 퍼진 건축 구조는 포르투갈 남부, 그란돌라 시가 포함된 알렌테주 지역Alentejo의 전통적인 가옥 스타일이다. 포르투갈 남부 지방은 대륙성기후로, 볕이 강하고 매
우 건조하다. 따라서 이곳 사람들은 집의 내외부를 흰색으로 칠해 강한 햇빛을 반사하고, 건물 내부의 온도 변화를 줄이기 위해 두꺼운 벽에 작게 창을 낸다. 또한 발코니 공간을 만들고, 이러한 기후를 이용해서 수확한 작물을 말리기도 한다. 이 지역의 건축 재료는 주로 흙이나 돌, 자갈, 시멘트 등인데, 포르투갈 남부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전유한 시립도서관 역시 흰색으로 칠한 돌과 대리석을 활용했다. 그란돌라 시립도서관 건물은 2022 EU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상Mies van der Rohe Award과 2021 빅매트 국제건축상BigMat International Architecture Award 후보에 나란히 올랐다. 그만큼 이 공간에는 단순한 아름다움 이상의 특별함이 있다.
건물 외벽이 주는 강렬한 미니멀리즘의 첫인상을 지나 안쪽에 들어서면 여러 디자인적 고민을 거친 과감한 구조를 볼 수 있다. 우선, 전체 건물이 구태의연한 육면체가 아니다. 옛 건물처럼 큰 지붕이 벽을 덮는 구조가 아니라면, 근대 이후의 건물은 대부분 네모반듯한 상자 모양이다. 벽과 지붕의 끝이 꼭 맞는 통짜 구조는 아마 건물이 올라가는 땅의 작은 부분도 남김없이 사용하려는 현대의 경제 논리에 의해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란돌라 시립도서관은 1층 벽보다 천장을 과감하리만치 넓게 빼서 충분한 그늘막을 조성했다. 건물 전체는 안뜰을 품은 통로형 구조인데, 천장으로 인해 넓은 그늘이 만들어진 덕분에 1층에 통창을 내도 내부가 햇빛에 직접 노출되지 않는다. 나머지 창문은 모두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위쪽에 자리해 멀리서 반사되는 빛이 시야에 편안히 들어온다.
세부적인 공간 구성은 굉장히 자유롭다. 커다란 네모 안을 적당히 구획해 기능만 나누는 보통의 설계는 건물들의 정수리를 모조리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지만, 이곳은 다르다. 이 건물을 하늘 위에서 조감하면 여러 작은 네모들이 모여 큰 네모의 겉 테두리를 이루는 모습일 것이다. 심지어 층의 구획도 제각각이다. 일반 자료실과 식당 쪽은 1, 2층이 잘 구분되어 있지만, 이를 마주보는 다용도 강당은 2개 층을 다 터서 천장이 높은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놀랍게도, 모든 공간이 각자의 기능에 복무하는 여느 건물과 달리 이 도서관에는 기능하지 않는 공간도 있다. 정해진 기능도, 앞으로의 용도도 없고, 사람이 출입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노는’ 면적이다. 통로도 방도 아닌, 그저 남는 구역. 여기에 이 건물의 예술성이 있다.
그란돌라 시립도서관의 독보적인 분위기는 은근슬쩍 배치된 여유 공간에서 나온다. 쓸모없는 듯한 안뜰의 자갈밭과 덩그러니 심어진 자카란다Jacaranda 나무 한 그루, 강한 볕은 막아주면서도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 통로, 무심하게 조각을 떼어내고 남은 구덩이처럼 배치된 발코니와 창문… 기능이나 효율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기후에 대한 디자인적 고민을 담은 공간은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백에 관대한 태도는 현대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비워두지 못하니 효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생산 라인은 계속 가동되고, 전기와 냉난방 등의 에너지는 끊임없이 소비된다. 그란돌라 시립도서관에 있는 멈춤의 아우라는 휴먼 스케일human scale 바깥, 직접 활용할 수 없는 공간의 존재 자체에서 나온다. 그 형태에 시선이나 빛이 닿아 생기는 그림자로만 있는 공간에 둘러싸여 우리는 자연에 가까운 단순함을 만난다. 푸른 보랏빛의 자카란다 꽃이 흐드러지는 계절에도, 마른 나무만 우두커니 남은 계절에도, 이곳은 한결같이 평화로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