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초록빛 바다를 배경으로 누운 두 사람, 도자기 색 피부를 빛나게 하는 붉은 머리카락과 선명한 빨간 옷, 파란 눈동자와 파란 비즈를 엮은 목걸이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여름의 잠수』를 기억한다면 일러스트레이터이
자 작가인 사라 룬드베리(Sara Lundberg)를 이미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보 야쿠프』 『내가 아닌 누군가를 생각해』 『우리는 달린다』 등 다수의 어린이 책에 그림을 그렸고 2013년 볼로냐 아동 도서전에서 스웨덴을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 31인에 선정되었다. 룬드베리는 2009년에 출간된 첫 단독 작품 『선 긋는 소녀』에 이어 2017년 자신이 글을 쓰고 그림까지 그린 두 번째 작품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로 아우구스트상과 올해의 스웨덴 그림책인 스뇌볼렌상, 엘사 베스코브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 스웨덴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사라 스트리츠베리(Sara Stridsberg)가 글을 쓰고 룬드베리가 그림을 맡은 『여름의 잠수』는 2019년 아우구스트상 최종 후보작이기도 했다. 『잊어버리는 날』은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 이후 오랜만에 발표한 단독 작품으로 2023년 북유럽 협의회 아동 청소년 문학상 후보에 올랐
다.
사라 룬드베리의 『잊어버리는 날』 표지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몸을 굽혀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과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고 있는 아이,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선명한 색감, 번짐과 큰 붓질 등 대담한 표현으로 몽환적이면서 연극적으로 과장된 분위기를 연출하고, 인물의 표정이나 몸짓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느낌이나 기분을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듯한 효과를 가진다. 이러한 룬드베리 특유의 그림체는 깊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 책장을 빠르게 넘기는 대신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상상하며 그림 속으로 빠져들면, 슬그머니 짓는 미소부터 빵 터지는 함박웃음까지 곳곳에서 작가의 위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인물 간의 관계성은 매우 익숙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공감대를 한껏 넓힌다.
안 풀리는 그런 날
토요일 아침, 포근한 이불 속에서 늦잠을 자며 조금 게으름을 피워도 되는 주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황급히 흔들어 깨우는 엄마 때문에 노아는 놀라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알마의 생일 파티가 오늘인 것을 깜빡해 두 시 파티에 가기 전에 서둘러 선물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아는 학교에서 친하게 지낸 적이 없는 알마의 생일 파티에 가고 싶지 않다. 등을 돌린 채 바삐 설거지를 하면서도 아이를 달래고자 하는 공허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청 재미있을 거야.”
세상에 나와 그런 약속에 희망을 가진 게 한두 번인가 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노아는 최대한 느릿느릿 양말을 신는다. 손이 두 개뿐인 게 원망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엄마와 사뭇 대조적이다. 이럴 땐 재촉해도 별 소용없음을 아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기다리기보다 보통 달려들어 거들곤 하는데, 아이 눈에 엄마의 그런 모습은 ‘마치 덥석덥석 잡고 쭉쭉 당기고 덜그럭대는 로봇’ 같은가 보다..
엄마 손에 이끌려 시내로 나가 이곳저곳에서 이것저것 펼쳐 들어 보지만 마땅한 선물은 없고 시간은 자꾸 흐른다. 그렇지 않아도 조급한데 노아가 재킷을 두고 와 급히 찾으러 가는 일도 생긴다. 겨우 선물을 산 뒤 알마의 집 쪽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자리에 앉지만, 안도의 숨을 내쉴 틈도 없다. 이번에는 노아의 머리에 모자가 없다. 모자의 행방을 물었을 뿐인데 노아는 “물건 좀 잘 챙겨” 하며 날카롭게 던진 말이 떠올랐던 걸까, 서러움에 울음을 터뜨린다.
내가 노아의 엄마라면 어떤 판단을 했을지 한참 생각했다. 이미 선물도 샀고 버스에 앉았으니 나중에 찾으러 가자고 달랜 뒤에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가는 것을 우선으로 했을 것만 같아 문득 두려웠다. 냉혈한인 엄마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노아의 엄마는 아이가 아끼는 모자를 찾으러 가기 위해 버스에서 우선 하차한다. 아이의 손을 꼭 잡고는 있지만 떠나는 버스의 꽁무니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엄마에게 시선이 머무른 것은 딱 내 모습을 보는 듯해서이다. 울먹이며 눈을 비비는 아이가 무척 가엽지만 꼬옥 안아주고 눈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위로하지 못했던 것은 엄마도 내면의 성숙이 덜 된 불완전한 인간일 뿐인지라, 그 순간에도 별별 생각과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나는 고개를 돌린 채 그냥 집에 가버리고 싶다, 나도 엄마 보고 싶다, 울고 싶다 등 온갖 생각을 다 했었다. 저 당시에는 이보다 더 괴로울 수 있을까 하는 심정이었지만, 노아와 엄마의 상황을 빌려 돌이켜보니 웃음이 새어 나온다.
반전 있는 하루
노아 엄마에게 ‘오늘’은 그 어느 평일보다 피곤하고 괴롭기 그지없는 토요일일 것이다. 그러나 관찰자로서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은근히 기다려진다. 오랜만에 내 옆에 앉아 그림책을 함께 보던 아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혀를 찼지만, 그런 반응조차 우습다. 기대한 그대로 동화 속 엄마와 노아의 좌충우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드디어 알마의 집 앞, 밝게 웃는 얼굴을 장착하고 목소리를 한두 톤 정도 높여 생일 축하를 연호한다. 드디어 오늘의 미션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 싶었는데, 아뿔싸, 이번에는 선물이 없다. 황급히 앞장을 넘겨 등장인물이 선물을 버스에서도 갖고 있었는지 확인했다. 분명 노아가 앉은 자리에 놓여 있는데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면 버스로 오는 내내 조급해하던 엄마가 어서 내리라고 재촉하면서 선물을 잊어버리고 몸만 재빨리 내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초인종을 누르지도 못하고 남의 집 앞에 선 채로 잔뜩 힘이 들어 솟은 어깨를 하고 몸은 웅크린 엄마의 뒷모습은 사람의 형상을 한 좌절의 모습이라 해도 되겠다.
알마네 현관문이 드디어 열렸다. 그런데 생일 파티는 오늘이 아니다. 칸트는 긴장하며 기대한 바와 전혀 다른 의외의 결과가 나와 한꺼번에 긴장이 풀려 없어지는 순간에 웃음이 발생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극적인 상황에서 웃음이 터진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뿐인가. 도도하게 왕관을 쓴 알마가 오늘 왜 여기 왔냐는 듯이 부릅뜬 눈에 힘을 준 데에 비해 오늘 왜 여기 왔는지도 난 모른다는 듯한 순진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굳은 듯 선 노아 사이의 긴장감은 코믹하기까지 하다. 그럼 다음 주에 보자고 멋쩍게 돌아서는 게 최선인데, 여기까지 온 김에 차 한잔하고 가라는 초대에 응하기까지 하니 되는 일 없는 이 유별난 하루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잊어버리는 날』에 실린 룬드베리의 그림 중 하이라이트라 하면 노아의 엄마와 노아, 알마의 아빠와 알마가 긴장하고 어색한 채 테이블에 둘러 앉은 바로 이 장면을 꼽아 본다.
그냥 그런 하루
“내일은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 없어요?”
“없을 것 같아. 중요한 건 없어.”
“그럼 우리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네?” 엄마가 빙긋 웃었어요.
“그래, 내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
실수 연발, 깜빡 연발인 하루가 저물어 가는 저녁, 포근한 소파에 앉은 엄마가 엄마의 다리를 베고 누운 노아를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도란도란 대화한다. 이토록 한가한 저녁이라니! 낮 동안 일어난 별의별 일들을 돌이켜보면 마치 전혀 다른 사람들 같다. 살다 보면 별것 아닌 일이 큰 사건으로 비화해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날이 있고 작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며 정신을 쏙 빼놓는 날도 있다. 노아와 엄마는 아무 일도 없는 일요일을 기약하며 오늘 같은 그냥 그런 하루는 잊어버리기로 한다. 길었던 하루가 저물고 소파에 머리를 대니 스르륵 잠에 빠져든다. 나와 책을 보던 아이가 홀로 블럭 쌓기를 하는 노아를 두고 소파에서 잠든 노아 엄마를 가리키며 “엄마 같아” 하며 씩 웃어 보인다. “맞네” 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할 즈음부터 내가 하루의 끝자락에 소파에 몸을 기대면 아이는 “피곤하지? 눈을 좀 감고 쉬어” 하며 친절하게 쿠션을 놓아주곤 했다. 사라 룬드베리는 ‘잊어버리는 날’이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평온한 시간, 그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 웃음을 머금은 입매와 사랑을 가득 품은 눈빛은 잊히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