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K 전성시대. 어디에든 ‘K’만 붙이면 다소 촌스러운 무언가로 치부되던 시절도 있었으나, 현시점 ‘코리아’는 강렬한 최신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꽤나 ‘쿨’한 곳이 됐다. 지나친 순정처럼 들릴까봐 부끄럽긴 한데,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이런 날이 오리라 믿었다. 그게 이번 생인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솔직히 아직도 얼떨떨하다. 하루아침에 평민에서 공주가 된 신데렐라도 이 정도로 현실감각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다. 적어도 걔는 백마 탄 왕자라도 직접 대면 했지… K의 위상을 확인한다고 해봐야 한국 아이돌 가수의 노래와 춤을 커버하는 해외 팬들의 유튜브 영상정도가 전부이다 보니 도통 시류를 체감할 길이 없다. 어쩌면 너무 익숙한 탓일 수도 있겠다. 공기처럼 항상
마시고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니 중요성을 모르는 거다. 이럴 땐 무게중심을 살짝 바꿔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바깥으로 혹은 아주 깊숙한 안쪽으로. 세계는 알고 우리는 잘 모르는, 알듯 모를듯 묘한 존재감의 K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것이 알고 싶어졌다.
『Make Break Remix: The Rise of K-Style(메이크 브레이크 리믹스: K-스타일의 부상)』은 영국의 유명 출판사 ‘Thames & Hudson(템즈앤허드슨)’에서 펴냈다. 1949년 설립된 템즈앤허드슨은 주로 회화, 건축, 디자인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출간하는 유서 깊은 아트출판사로, 영국의 파이돈Phaidon, 독일의 타셴 Taschen과 함께 세계 3대 미술 전문 출판사로 꼽힌다. 템즈앤허드슨이 한국 현대문화를 주제로 책을 자체 기획해 출판한 것은 70여 년 역사상 이번이 처음. 이는 영미권 아트출판사를 통틀어서도 최초의 시도다. 그동안 해외에서 한국문화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있어왔던 만큼 이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세계 예술의 흐름을 주도해온 곳에서 능동적으로 한국문화를 소개하려 한다는 건 분명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만큼 한류를 국제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으며, 새로운 예술적 가치의 생산기지로서 한국의 가능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공신력이 반드시 책의 공신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문화 관련 책이 인지도 높은 출판사의 이름으로 발행된다는 사실 또한 여지없이 환영할만한 일이다.
집필은 런던에 거주하며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프리즈 서울아트페어 등 한국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홍보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는 피오나 배(배지영)가 맡았다. 템즈앤허드슨 측이 그에게 처음 출간을 의뢰한 건 2018년으로, 당시 출판사의 요청은 ‘케이팝과 패션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사진집’이었다. 만약 그 내용 그대로, 현재 유행하는 몇몇 한류 소재의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조명했다면 전혀 새로울 게 없었을 터. 이에 피오나는 역으로 제안한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다 근본적인 요소로 확대하여, 왜 한국에서 이런 ‘스타일’의 문화가 태동했는지 그 이유와 배경을 정리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피오나는 그간 쌓아온 홍보 업계 네트워크
를 총동원해 ‘K-스타일’이라는 문화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는 인물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책에는 안무가 리아킴, 밴드 ‘새소년’의 리더 황소윤,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태오, 미술작가 이광호,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 타투이스트 도이, 드랙 퍼포머 나나영롱킴, 싱어송라이터 림 킴, 비주얼 디렉터 허세련, 래퍼 그룹 ‘DPR’의 설립자 DPR REM 등 분야를 막론한 18명의 크리에이터가 등장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업물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들려준다.
여기에 더해 세 명의 필자가 참여한 에세이 역시 흥미롭다. 블랙핑크 작사가인 데니 정Danny Jung, 글로벌 패션 플랫폼 하입비스트(HYPEBEAST)의 매니징 에디터 이윤정Elaine YJ Lee, 홍대 라이즈 호텔의 브랜드 디렉터 제이슨 슈라바흐Jason Schlabach는 각기 다른 현장에서 포착한 K-스타일의 근원과 전망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농밀하게 전한다. 이 밖에도 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의 서문, 패션 저널리스트 홍석우가 쓴 주목할만한 한국패션 디자이너 네 명에 대한 글 역시 강한 개성을 드러내며 읽는 재미를 돋운다. 책은 사진집으로도 특별히 매력적이다. 국내 정상급 가수들의 앨범 자켓을 촬영했으며 『보그』 『바자』 『지큐』 등 내노라하는 패션지 화보로도 유명한 사진가 LESS(김태균)가 다섯 챕터에 걸쳐 선보이는 포토에세이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보다 더 파격적이고 유쾌한 K-스타일의 단면을 정확히 포착해낸다. ‘유스 컬처Youth Culture’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그는, 18명의 인터뷰이 사진 외에도 평소 서울 거리 곳곳에서 마주한 청년들의 모습을 함께 담았다.
304쪽에 이르는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K’라는 씨앗을 품는다. 그러나 온몸을 부풀려가며 발아시키지는 않는다. K-스타일이 무엇인지 구태여 정의하거나 범주화하려는 대신, 그 거대한 해일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방식을 택했다. 서울을 베이스로 활약하는 젊은 크리에이터들이 책 속 주인공이 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저자는 K-스타일의 근거지인 서울에서 지금 한창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어가는 인물들에 주목하고자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큰 그릇이라 할 수 있는 도시야말로 인위적으로 포장된 것이 아닌 본 모습 그대로의 K-스타일을 보여주는 최적의 방향성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한국의 유스 컬처를 이끌어가는 이들 중 다수는 오랜 해외 생활 경험이 있거나 직업 특성상 외국을 자주 오간다. 그러나 18명의 청년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지금 가장 새롭고 신선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서울’이라고.
방탄소년단, NCT 등 강력한 파급력을 가진 셀러브리티들의 스타일링을 담당하는 김영진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바쁜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의 성장을 밀어붙이는 원동력으로 지루할 틈 없는 서울의 풍경을 꼽는다. 가끔은 그것이 자신을 옥죄고 잠 못 들게 만들지만, 아침에 한강을 건널 때면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금 사랑에 빠진다면서. 브랜드 이세IISE를 이끄는 김인태·김인규 디자이너는 서울이 K-스타일의 거울 격이라 말한다. 첨단 테크놀로지를 등에 업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는 트렌드의 속도가 곧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것. 힙합 캐주얼 브랜드 미스치프MSCHF의 정지윤·서지은 대표는 자신들의 감성적 본질을 서울의 서브컬처와 아날로그 문화에서 찾는다. 작가 이광호는 K-스타일의 부상을 성수동의 변화와 맞물려 설명하기도 한다. 서울을 기반으로 시작된 이들 크리에이터들의 움직임은 어느새 자신의 영역과 입지를 확고히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동네에서 도시로, 세계로 이어지는 한국인의 스타일이 신기할 따름이다.
서울은 언제나 변화한다. 사람들은 그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고, 또 어디에든 적용시켜 한 발 더 나아가려 한다. 한마디로 서울은 멈추는 법을 모른다. 이같은 역동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한 기준과 원칙을 확립할 시간을 만들지 못하고, 그저 눈앞의 상황에 따라가기 바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서울을 너무나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이 도시의 변화무쌍한 성격은 ‘나만의 것’에 대한 욕구가 높은 젊은 세대의 성향과 만나 특색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K-스타일이 “한국 젊은이들의 강한 적응력과 실용적 사고 그 자체”라 설명하면서 무엇이든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
서 멋진 것을 쏙쏙 골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하는 태도가 오늘날의 한류열풍을 이끈 원동력이라는 결론을 맺는다.
책의 제목 역시 여기서 파생되었다. ‘만들고, 깨부수고, 혼합하는’ 태도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중요한 문화 유전자 중 하나다. 물론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제법 보수적인 방법일지도 모르겠지만, 미래를 위해 과거를 흡수하고 현재를 각색하는 태도를 통해 배울 게 적지 않아 보인다. 본래 스타일이란 경험과 발전의융합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는 기회의 씨앗이 심겨진 셈이다. 세계 곳곳에 스며드는, 언제고 꽃피울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