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지은경 / 글 호정 아우드네르데hojung audenaerde / 영한번역 이희수
사진 ⓒ visibleINvisible(hojung audenaerde & Bruno Figueras)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아시아인이 아닌 채로 보냈다. 그 사실을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유럽인 부모에게 입양된 후 미국에서 생활했다. 외부 세상과 그곳의 삶을 경험하는 동안 내 정체성은 아시아적 요소에 의해 형성되지는 않았다. 이는 내 정체성과 외적 측면 사이에 엄청난 분열을 가져왔다. “당신은 어느나라에서 왔나요?”라는 의례적인 질문은 좌절과 원망의 감정을 증폭시켰다. 사람들이 듣고자 기대한 ‘민족’에 대해 나는 어떤 연결점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제품의 대대적인 소비 열풍이 불고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가 세계를 매료시키기 이전, 한국은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가려져 있던 나라였다. 입양아로서 나는 한국의 역사, 문화, 언어 등 한국의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자랐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항상 이어지는 또 다른 질문, “북한? 아니면 남한?”이 뻔하고도 어리석은 질문을 지나 사람들은 “정말로 개를 먹나요?”라는 비웃음 섞인 질문을 던진 후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면 내게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깊게 남았다. 내게는 삶의 경험을 나누며 생겨난 인연이나 진정한 공감, 그리고 문화적 자부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회적 롤모델이나 공동체, 그리고 부모가 없었다.
백인이라는 높은 사회적 위치에 적응하려던 내 욕구는 너무도 철저했다. 당시 이민자들과 난민들, 다른 아시아인들과 마주했을 때도 나는 내가 그들 사이에 속한 자로 인식되지 않기를 희망했다. 자기기만이 어찌나 심각했는지, 내가 내 사진을 보기라도 하면 “이런! 나는 너무 아시아인 같잖아!” “이 아시아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내 안의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 거의 완전히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내 외형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나를 아시아인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내 정체성과 성격, 의식, 사고방식, 지각은 완전히 조건화되어서 다르게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후 나는 태국, 캄보디아, 인도, 스리랑카, 네팔, 티베트 등을 여행하면서 아시아 문화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한국에 도착했다. 흥미롭게도 내가 처음 도착한 곳은 북한이었다. 북한으로의 여행은 나의 기원을 찾기 위해 남한을 방문해 친부모와 재회하고 잃어버린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우여곡절로 가득찼던 북한에서의 여정은 롤러코스터와도 같았다. 솟구치는 고저, 상쾌한 성취감이 들다가도 예기치 못한 당황스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벅차게 숨이 차고, 충격을 받기도, 또 낙담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한에서의 친가족 상봉이라는 감동적인 성과를 이뤄낸 첫 여행을 마치고 얼마 후, 나는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번에는 예술가이자 요가강사로서, 또 미학과 음식에 몰입하기 위한 장기 체류였다. 이는 연결이 끊어진 채로 살아왔던 세월을 만회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한국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됐고 모든 것에 영감받았다. 살면서 한 번쯤 다수에 포함되는 일은 근사하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 투영되는 나 자신을 보는 것, 비록 타인의 삶에 있는 퍼즐 조각을 즉시 맞출 수 없듯 즉각적으로 인식되지는 않겠지만, 피상적이나마 일종의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다. 한국 여행 중 나는 영혼이 팽창하고 가슴이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자 ‘나는 한국 사람이에요!’라고 속으로 외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