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il of Tales: 동화 꼬리잡기
그 지하철, 나도 타보고 싶다
에디터 전지윤
자료제공 한솔수북
어릴 적 일이다. 자주 탄 경험이 없는 지하철을 탔는데 깜깜한 지하를 나와 다리 위를 지나갔고, 한파에 커다란 스케이트장이 된 한강 위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하철 창문에 바짝 붙어 유리창에 손을 대고 바라보던 것까지 기억나는 게 분명 그 풍경이 꽤 설렜나 보다. 『남극으로 가는 지하철』을 받은 날, ‘이만큼 함박눈을 내려주마’ 하는 듯 눈을 머금을 하얀 구름이 층층이 있는 하늘 아래 지하철이 다리를 지나는 표지 그림은 나를 마치 과거로 데려다준 것 같았다. 이 지하철은 남극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여행도 가능한가 보다.
가끔 ‘쿠쿵, 쿠쿵, 쿠쿵’ 하고 지하철이 달리면 마치 심장이 크게 뛰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다. 어른이 되어 지하철을 타는 데에는 목적지와 용무가 있기 때문이다.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은 ‘지옥철’이다. 그 진절머리 나는 한낱 교통수단이 아이들에게는 환상적인 탈 것이다. 지하철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유난히 길고 승차권을 사는 것도 커다란 화면을 누르는 것 같아 재미있다. ‘띠릭’ 소리를 내며 개찰구를 통과하면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띠리리리’ 하는 소리를 내며 바람이 세게 불어오면 불빛을 비추며 역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보는 아이들의 얼굴에 신나는 기대감이 피어오른다. 지하철은 마치 공룡이나 거대한 뱀처럼 커다랗고 길다. 그 뱃속으로 들어가 지하를 달리다 보면 불빛도 빠르게 지나가고 문도 열렸다 닫힌다. 엄마, 아빠나 다른 보호자가 내리자고 할 때까지는 어디로 가는지, 언제 내리는지도 알 턱이 없으니 아이에게 지하철 여행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크면서 한 번쯤 지하철에 ‘꽂히는’ 것이 이 때문인가 보다.
『남극으로 가는 지하철』의 주인공 성찬이는 그런 아이들의 기분을 정말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하철 여행의 목적지를 지구본 저 아래 엄청나게 넓은 하얀 땅 남극으로 정해 길고 특별한 여행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성찬이는 지하철역에서 남극행 지하철을 기다린다. 목적지가 워낙 멀고 가는 사람은 적으니 자주 오지 않는지라 조바심내거나 짜증 부리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 컴컴한 굴 쪽을 향해 뒤돌아서서 점퍼에 바지, 가방과 모자까지 초록색으로 맞춰 입은 성찬이가 있는 지하철 승강장에는 아무도 없다. 다들 자주 오는 차편을 타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펜으로 쓱쓱 그려 마치 꿈틀거리는 듯한, 고요한 승강장은 ‘왜 안 오지’ 하고 자꾸 급해지는 성찬이 속마음 같다.
드디어 탄 남극행 지하철은 이제 함박눈이 내리는 다리 위를 달린다. 답답했던 승강장을 지나 뻥 뚫린 기분처럼 하늘은 새파랗다. 눈을 가득 머금은 하얀 구름이 층층이 하늘에 떠 있고 눈을 꽤 오래 뿌릴 기세다. 그렇게 긴 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남극은 상상 이상으로 즐거운 곳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펭귄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데 엄마 펭귄이 아기 펭귄을 데리러 오고, 성찬이도 퍼뜩 자신을 기다릴 엄마 생각이 난다. 페이지를 넘기면 곧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게 된다. 너무 긴 지하철 여행을 자주 할 수 없는 성찬이 대신, 이번에는 펭귄들이 성찬이를 향해 지하철 여행을 올 테니 말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때마다 꽂히는 게 있다. 우리 집 어린이는 어릴 때 줄곧 ‘우주’를 그렇게 좋아해서 온갖 별, 행성, 위성들을 줄줄 꿰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얘는 우주에 관한 영재일까?”라고 질문한 지 얼마나 됐을까. 다른 아이들은 이미 한 차례 지나간 ‘공룡의 모든 것이 궁금한 때’가 내 아이에게도 찾아왔다. 그렇게 흥미와 호기심 거리는 바뀌는 게 당연하다. 다만 어떤 것은 눈 깜짝 할 새에, 또 어떤 것은 좀 더 길게 그 지속되는 시간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책의 주인공이자 그림을 그린 성찬은 지하철에 대한 애정은 식은 적이 없다고 한다. 지하철과 지하철 여행이 왜 좋은지 어떤기분인지 구구절절 말해주지 않아 성찬의 속마음이 어떤지 모르지만,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생기 가득한 표정과 편안한 몸짓 등을 보며 짐작해온 바로는 그렇다.
『남극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획한 권은정은 고3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어머니와 함께 기관을 찾아왔을 때부터 성찬이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그는 말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단답형 대답이 대부분이고 세 단어 이상 이어지는 때도 드물다. “어려워”라고 하면 더 이상 대답하기 싫은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질문도 대답도 잘 안 하니 선생님이 나서서 많은 질문을 던져 대답을 유도했다. 얼굴 표정도 살피고 몸짓 하나하나 섬세하게 신경 쓰고 관찰하며 성찬의 기분과 의사를 알아채고 그가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게 했다. 물감을 사용할 때 물 조절을 제대로 못해 혼날 때도 있었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분명했다.
성찬이는 곧잘 그림대회에서 상을 타왔고, 권은정 선생님에게 그림 수업을 받으러 오는 동안 그가 그린 그림들은 개성이 넘쳤다. 이외에 권은정을 매료시킨 것은 성찬의 수첩 속 그림들이었다. 지하철 역사, 개찰구, 승강장, 에스컬레이터와 계단, 지하철의 갖가지 모습과 안팎 풍경까지 다양한 장면들을 보고 있자니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은정은 글 쓰는 친구 김경화에게 지하철을 그린 것이며 눈 오는 날, 남극 등 여러 그림을 보여주었다. 김경화 작가에게도 성찬의 그림은 매력적이었고, 그녀도 성찬 씨의 그림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김경화 작가는 친구 권은정에게 ‘1년, 아니 2년이 되어도 좋으니 그림들을 모으라’는 지령을 내렸다. 권은정 기획자는 차곡차곡 모은 그림과 그림 그리는 동안의 상황, 무엇을 어떻게 왜 그렸는지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설명하여 전달했다. 그림을 건네받을 때마다 김경화 작가는 숨은 이야기를 상상하여 글을 썼다. 보통의 이야기책과는 달리 그림 작가와 작품에 맞도록 이야기 작가가 글을 쓰고 그 사이에서 모든 과정의 연결고리인 기획자가 협력한 결과물이 『남극으로 가는 지하철』이다.
물론 그림 잘 그리는 성찬이가 그림 작가 김성찬으로 거듭나는 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이야기 작가와 기획자의 요구가 과하다 싶으면 성찬이는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인물 그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에 주인공조차 그리지 않으려고 하면 권은정은 기획자에서 다시 선생님으로 돌아와 성찬이를 채근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여정은 수 차례 출판사에서 거절당하는 현실의 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 책은 한솔수북에서 재출간되기 이전에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그 기회를 찾아야 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의기투합하여 남극을 향한 따뜻한 지하철 여행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접할 수 있게 되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