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eg’s ch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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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1

‘나’와 ‘너’의 사이

글.김정희

꿈꾸는 독서가. 책을 통해 세계를 엿보는 사람. 쌓여가는 책을 모아 북 카페를 여는 내일을 상상한다.

『너라는 생활』
김혜진 지음
문학동네

수능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 몇몇은 코로나19 때문에 가정 학습에 들어갔고, 교실에 남아 있는 몇은 수시 원서 접수를 마친 ‘미리 대학생’의 마인드로 교실에 모여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인생 이야기를 해보자며 수업 끄트머리에 아이들과 빙 둘러앉았다. 아이들에게 펼쳐질 20대의 생기 어린 삶을 생각하며 내가 지레 들떠 담소를 나누던 중 한 아이가 불쑥 물었다. “선생님,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을까요?” 꽃다운 청춘에 이게 웬 말?! 고등학생의 소액 주식 투자만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나타난 생경한 풍경이었는데, 하물며 ‘내 집 마련’을 운운하는 고등학생의 진지한 모습에 아연해졌다. 이 말을 필두로 화제는 갑자기 아르바이트로, 그리고 마침 가열되고 있던 인근 지역의 대형 쇼핑몰 착공으로 불거진 집값 상승 이야기로 이어졌다. 공부를 했건 안 했건 학창 시절에 억눌린 한을 어떻게 풀고 어떻게 놀까 하는 포부에 가득 차 있던 예전의 고등학생들이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적 자립을 위한 고민이 아이들의 한켠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시대의 삶을 이끄는 자본의 논리가 연령대의 허들을 넘으며 시나브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번 팬데믹으로 상위층의 주식 재산 증가와 더불어 ‘개미투자자’들의 투자 열풍이 화젯거리가 되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대학생, 직장인, 주부들까지 자산가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투자시장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김혜진의 단편소설 「3구역, 1구역」에는 투자 열풍에 편승해 잘 살아보려는 소시민의 모습이 그려진다. 자본의 논리가 이미 삶 속에 깊이 녹아들어 있는 상황에서 재개발을 염두에 두고 자산 증식의 기회를 꾀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나’는 재개발 3구역에 거주하는 세입자이지만 “재개발사업 계획이 고시된 뒤에 이사를 온 탓에 임대주택에 들어갈 자격도, 재개발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거취 문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참석한 재개발 공청회 자리에서 우연히 ‘나’는 ‘너’를 만난다. 둘은 구면이다. ‘나’는 사람의 발길이 뜸한 지역에서 발견한 아픈 들고양이를 보살피다 ‘너’를 만났었고, ‘나’는 들고양이 구조에 적극적인 ‘너’를 보면서 막연히 따뜻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너’는 서로 양보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자기 몫을 챙기느라 재개발 시기를 늦추는 3구역 주민들에 대한 분개 섞인 불만을 비추면서도 들고양이에 대한 염려를 잊지 않는다. 아픈 들고양이 구조 작전에 동참하면서 ‘나’는 ‘너’가 재개발이 완료된 1구역에 사는 부동산중개업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그는 3구역 토박이었는데 재개발 상황에서 ‘요령 있게’ 부동산 차익 실현을 이뤄 1구역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나’보다 경제관념이 밝은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거북스러움을 느낀 ‘나’는 둘 사이의 계층의 차이를 인식하게 된다. “그때 대출 끼고 몇 개 더 사뒀으면 좋았을껄”이라고 말하는 ‘너’와, “허름한 주택을 개조해서 카페를 만들고, 서점을 열고, 식당을 차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나’가 있다. 그리고 ‘나’와 ‘너’의 사이에는 폐허가 되어가는 동네에 버려지고 살 길이 막막한 들고양이들이 자리한다. 병들어가는 들고양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비어 있는 집을 기꺼이 들고양이를 위해 개방하는 ‘너’, 동시에 ‘요령 있는 사람들이야 어디서나 잘 살죠’라는 말로 무심결에 ‘나’의 마음을 후벼파는 ‘너’의 마음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살 곳을 잃는 주민들보다 살 곳을 잃게 될 들고양이들을 생각하며 ‘재개발이고 뭐고 그냥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수십만 원의 자비를 들여가면서까지 들고양이를 보살피는 ‘너’에 대해 불편함을 넘어 불쾌감까지 느끼는‘나’는 왜 ‘너’를 이끌리 듯 계속 만나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고, 불편해서 끊어내고 싶지만 매번 ‘너’에게 약해져 관계를 이어가는 ‘나’의 취약성은 반응하는 능력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대의 인간적인 면모를 섬세한 눈길로 바라보고, 신중하게 말을 다듬어 반응한다. ‘너’를 받아들이는 ‘나’의 감수성이야 말로 ‘너’와의 간극을 메우고 ‘너’의 양면성을 인간적으로 받아들이는 동력이 아닐까.‘너’는 어쩌면 서른 살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어느 열아홉의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자본의 시대에 계층 이동을 꿈꾸는 소시민의 모습이다. 이미 구조적 모순이 팽배한 사회의 자본 논리에서 소시민의 욕망은 씁쓸하지만 비난할 수만은 없기도 하겠다. 그렇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끌리 듯 ‘너’와 연결되며 섬세한 감수성의 날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본다.